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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CEO, 강인함과 끈기로 승승장구

기사입력 2017-12-22 18:02:34 | 최종수정 2017-12-22 18: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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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레이(丁磊) 왕이(网易) CEO ⓒ 봉황망(凤凰网)
최근 왕이(网易, Netease) 창시자인 딩레이(丁磊)와 관련된 화제가 연일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지난 10월 딩레이는 ‘왕이웨이양(网易味央)’ 산하 두 번째 양돈장을 정식으로 장시(江西·강서)에서 열고 11월 6일 ‘신소비(新消费)’ 관점을 제시했다. 11월 8일 131년 역사의 덴마크국보급 브랜드이자, 유기농 전문 슈퍼마켓 체인인 ‘일마(Ilma)'를 보유한 왕이 카오라하이거우(考拉海购) 플랫폼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했다. 이어서 ’쌍11(双十一, 매년 11월 11일에 열리는 중국 인터넷 쇼핑몰 할인행사의 날)‘ 전날 저녁 딩레이는 친히 사용자들에게 100% 정품 보증 승낙서를 발표했다.

올해는 왕이 설립 20주년이다. 20년간 왕이는 끊임없이 찬란함을 향해 전진해 왔다. 그러나 딩레이의 인생 기복을 자세히 보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속된 이직, 어쩔 수 없이 창업, 회사 매각 불가, 낙오 등에 직면했던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를 하나하나 극복해낼 수 있었을까?

◇역경 속에서 일궈낸 창업

1971년 닝보(宁波·영파) 펑화(奉化·봉화)에서 태어난 딩레이는 엔지니어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라디오를 좋아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자신의 첫 6튜브 라디오를 조립해 중단파와 FM방송을 수신할 수 있었다.

1989년 전자과학기술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자주 도서관에 가서 외국어 과학기술·컴퓨터 서적을 뒤적이고 전자기장 CI 소프트웨어를 조직하는 성과를 보여주며 대학시절에 선명한 기억을 남겼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부모의 제안에 따라 전신국에서 일하게 된다. 이는 당시 가장 좋은 직업이었지만 그는 유달리 힘들어 했다. "매일 멍하니 다녔어요.” 훗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가족들의 성원을 잃은 그는 혼자 광저우(广州·광주)로 가서 Sybase와 Flypowers 두 IT회사에서 잇따라 일했지만 일련의 원인으로 모두 지속하진 못했다. 하지만 역경 속에서도 방심하지 않고 노력해 나간 그에게 다시금 기회가 찾아왔다.

전신국에서 일했던 2년간 그는 결코 덮어놓고 낙담하지 않았다. "그 때 저는 거의 매일 밤 12시가 되어서야 퇴근을 했어요. 왜냐면 회사에 Unix 컴퓨터가 있었거든요. 왕이의 훗날의 성공은 제가 일찌감치 Unix의 정수를 파악했기 때문이죠” 라고 그는 말했다.

Flypowers에서 그는 여유시간을 이용해 Chinanet에 첫 ‘훠냐오(火鸟)’ BBS를 가설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네티즌을 사귀며 창업의 인맥을 쌓았다.

1997년 딩레이는 사람들에게 소프트웨어를 해주며 모은 돈으로 회사를 차리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회사’는 그를 포함해 겨우 4명만으로 구성되었으며 ‘왕이’로 불렸다.

훗날 왕이는 BBS에서 무료이메일로 발전했고 다시 포털사이트로 발전하며 중국의 hotmail이 되었다. 1998년 왕이는 일일 방문량 10만 명을 기록하며 광고매출액 10여 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왕이의 광고수입이 70만 달러에 달했다. 이로써 왕이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포털사이트 중 하나로 부상했다.

◇ 강인함과 끈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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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레이(丁磊) 왕이(网易) CEO ⓒ 봉황망(凤凰网)
2000년 6월 30일 왕이가 나스닥에 상장을 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미국 나스닥에 발을 내디딘 왕이에게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상장 당일 장 마감시간까지 왕이 주식은 15.12달러(약 1만6천원)까지 하락해 15.50달러(약 1만7천원)의 발행가격을 밑돌았다.

주가폭락은 딩레이에게 극도의 압박감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업자도 등을 돌리고 왕이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어 갔다. 2001년 초 그는 가장 절박한 심정으로 왕이를 매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해 9월 나스닥이 재무제표에 의문점이 있다는 이유로 왕이 주식 거래 중단을 발표했다. 연이은 충격은 그의 30세를 매우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의 강인함과 끈기가 다시 한 번 그를 구했다.

딩레이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지혜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덕경(道德经)’을 읽고 ‘상선약수(上善若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는 도한 ‘동아상대론(冬吴对论)’의 사회자 량둥(梁冬)과 함께 중의(中医)를 배웠다.

어수선한 국면을 수습하고 오래된 문제들에 직접 대면하고 전환을 시도하는 등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왕이는 2002년 초 거래를 재개하고 같은 해 4분기에 흑자를 실현했다. 그는 첫 번째로 인터넷 게임 ‘대화서유(大话西游)’ 를 투자 개발했으며 두 번째로 운영업체와 협력하여 문자업무 ‘모바일드림넷’을 개발했다. 2003년 그는 중국 100대 부호 1위에 올랐는데 전년도에는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었다.

"인생은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가끔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비록 넘어진다고 해도 한 줌의 모래를 손에 쥐는 줄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는 딩레이의 말이다.

◇ '느림의 철학’ 과 ‘신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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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레이(丁磊) 왕이(网易) CEO ⓒ 봉황망(凤凰网)
딩레이가 줄곧 신봉해 온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용자 체험을 잘 만들기만 하면 오히려 앞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느림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저희 인터넷 아이디어 중 ‘빨리’는 특별히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저의 제품 각 버전은 모두 훌륭하지만 더욱 더 완벽을 추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느림’과 ‘고집’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는 게임을 만들려고 비서 한 명만 데리고 둘이서 전국을 20여 일간 돌아다니며 매일 저녁 대략 10개의 PC방에 간 적이 있다. 그는 또 양돈사업을 하려고 미국 및 유럽 십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먼저 양돈모델을 확립한 후 저쟝(浙江) 48개 지방을 일일이 조사하여 마침내 지안(吉安)을 양돈장으로 선택해 남극 스테이션을 설계한 사람을 초빙하여 ‘딩쟈주쥐숴(丁家猪居)’ 를 설계하기도 했다.

이에 8년의 시간이 소요되면서 결국 양돈사업 동업자 3명 중 두 명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딩레이는 전자상거래를 하려고 친히 많은 시장을 방문하여 조사 연구를 벌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 서울에서 공급업체와 교류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 8시부터 일정을 시작해 낮 동안 십여 개 회사를 단숨에 방문하고 밤 11시가 되면 동대문으로 건너가 도매시장을 구경하고 직접 매니큐어, 얼굴 팩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비 온 뒤 그는 마침내 무지개를 보게 되었다.

올해 4월 ‘왕이웨이양’ 은 1.6 위안의 A라운드 융자를 완성했다고 발표했다. 카오라하이거우의 2016년 판매액점유율은 톈마오궈지(한자한자, Tmall), 징둥글로벌(한자한자, JD.COM) 등 다국적 전자상거래 업체를 추월해 출시 2년 만에 시장의 리더로 급부상했다.

"제 생각에 진정한 기업의 경쟁력은 진입의 빠름이나 늦음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 핵심이 진정으로 기술과 혁신을 통해 소비자의 체험을 개변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 말에 마침 그가 얼마 전 언급한 ‘신소비’ 개념이 떠오른다. "소비1.0 시대는 상품이 풍부하고 종류가 다양해 사용자가 언제 어디서든 상품을 찾을 수 있고 살 수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소비2.0 시대는 소비자가 더욱 좋고 더욱 우수하고 더욱 저렴한 상품을 더욱 안심하여 구매할 수 있는 동시에 삶의 멋이 풍부하고 환경보호와 건강을 중시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중국의 신소비가 진선미(真善美) 상태로 회귀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그는 말을 맺었다.

제휴매체 중국 ‘금교(金桥)’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왕이  #딩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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