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下 제3부 송화강 5천리 - 제3장 아라디촌(2)

기사입력 2018-12-06 10:44:54 | 최종수정 2018-12-06 10: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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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78년에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농업개체화를 하라는 새로운 경제정책에 대해 정확한 리해를 가지지 못한 김룡구는 우환의 포로가 되여버렸다. 고향을 떠나 낯설고 물선 타향에 운명이 던져진지도 반세기. 그동안 추우나 더우나 생사를 같이해온 마을사람들을 묶어세워 오손도손 재미있게 살아가는 민족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던 그의 꿈은 하루아침에 물먹은 모래담처럼 와르르 무너지는것 같은 실락감을 어쩔수 없었던것이다..

김서기가 세상을 뜬 후 알라디의 지도자들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천지개벽의 현실앞에서 한동안 갈팡질팡하였다. 바람에 따라 돛을 달듯이 토지를 개인한테 도급을 주고 집체공장도 80%나 개인한테 팔아버렸다. 그리고 촌 간부들도 개인 돈벌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개인 호주머니는 예전보다 불룩해졌지만 집체경제는 형편없이 떨어져 민족사회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공장을 경영하여 돈을 벌었거나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 그리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너도 나도 도시로 들어가고 마을엔 재간이 없고 돈이 없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만 남은 실정이 되였다. 그렇다고 도시속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해서 다 성공하는것도 아니다. 더구나 조선족은 한족들처럼 사회관계가 밀접하지 못하므로 도시에서 기업을 경영하여 성공한다는것은 아주 힘겨운 일이고 일단 성공을 했다고 해도 민족경제는 재빨리 동화되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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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디 닭가공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성들
《86년도에 새로운 촌지도부를 내오고〈농업을 기초로 하고 집체기업을 적극 발전시키며 상업을 흥성하자〉는 새로운 방침을 세웠습니다. 촌정부에서는 세금을 거둘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집체기업을 꾸리고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것을 앞세우고 개인경제를 부추기여야만이 도시화한 농촌을 건설할수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간부라면 우선 자신이 부유해지는것이 아니라 군중을 이끌고 부유해지는 길로 나가는것이 근본책임입니다. 우리 진 이도촌(二道村)은 원래 알라디보다 못지 않은 경제기초를 가진 조선족마을이고 지리적조건도 알라디보다 훨씬 좋지만 간부들이 사욕만 채우고 도시로 떠나간 연고로 지금은 형편없이 뒤떨어졌답니다.》

알라디촌당위원회 차인석(车仁硕 47세)부서기의 말이였다.

《우리 마을이 부산해지고 촌경제가 침체상태에 빠진 다음에야 나는 부친님이 저를 마을에 붙들어두려고 한 깊은 뜻을 알게 되였습니다. 가뜩이나 소수인 우리 산재지구 조선족들은 흩어지면 동화되고맙니다. 본거지를 고수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뭉쳐야지요. 뭉치자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란 바로 돈이 있어야 하는겁니다. 개인이 잘 살아야 하지만 그보다도 집체의 경제실력이 강해서 마을을 도시화해야 하는거지요. 나는 부친님 생전의 뜻을 받들어 알라디촌건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김석배서기의 말이다.

촌정부에서는 개인한테 팔았던 기업들을 다시 사들이고 농공상총공사(农工商总公司)를 꾸리고 산하에 농업분공사, 목축업분공사, 공업분공사 등을 두었다. 개방이후 근 8년간 저곡에서 몸부림치던 알라디촌은 다시 기를 펴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총 생산액이 4,800만원으로 리윤세금액 780만원 올렸다. 1995년에는 1억 1천만원(지난해 알라디를 제외한 전체 울라가만족진 27개 촌 인구는 6만 2천 6백 30명인데 총산치가 1억 2천만원임)이고 올해에는 1억5천만원이다. 2000년에는 4억원 총생산액을 바라보고있다. 알라디촌의 룡두기업, 기둥산업은 목축업공사로서 고기닭생산이 위주인데 국내는 물론 일본과 독일에까지 수출한다. 지난해 총산치는 9천만원이다. 농업이 차지하는 비률은 겨우 5%, 제3산업이 위주인 개체경제 비률도 5%에 불과하다.

《다년간의 분투를 거쳐 집체경제가 춰서기 시작하자 촌에서는 1994년에 10년내에 도시화 새마을 건설계획을 세웠답니다. 이 정부청사를 중심으로 서쪽에 5백호가 입주할수 있는 아파트단지를 건설할 계획인데 보다싶이 6층 아파트 하나는 이미 짓고 들었습니다. 2년사이에 우리는 62호의 외지 조선족을 받아들였습니다. 기업이 발전하면서 로동력이 대량 수요됩니다. 지금 외지 로동자가 근 300여명이 와있지요. 그런데 우리 촌 인구는 마이너스증장입니다. 앞으로의 발전전망을 보아 우리 촌 인구는 만명으로 되여야 합니다. 우리는 륙속 외지 조선족을 받아들일 타산입니다. 1977년에 현과 향에서 가난하기로 소문이 난 전알라(前阿拉)의 26세대 한족과 만족을 우리 촌에 떠밀어 맡긴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44세대 178명으로 불었습니다. 그때부터 민족성분의 순수성을 잃은거지요. 그리고 지금의 학교를 중심으로 교육구가 건설됩니다. 민족교육은 민족운명을 고수하는 전초진지입니다. 우리 촌의 한족이나 만족들 대부분 자식들이 소학교부터 촌의 학교를 다니는데 그들이 오히려 조선족으로 동화되고있답니다. 우리 촌학교에는 원래 고중반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초중도 해소되고 소학교만 남았고 학생수도 유치원반까지 해서 240명밖에 안됩니다. 마을인구가 불어나면 학생수가 자연히 늘어날것인바 다른 고장 조선족학교처럼 학생이 없어 페교되지는 않을것이 아닙니까. 한편 직업학교를 세워서 자체로 로동자의 소질제고를 가져올 타산입니다. 아무리 기업의 설비가 좋아도 로동자의 소질이 낮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북쪽으로는 공업구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교육구옆에다가 민속촌을 세워서 대대손손 조선족의 미풍량속을 전해내려갈것입니다. … 》

김석배서기는 아름다운 원경계획을 펼쳐보이고 나서 현재 부딪치고있는 문제점들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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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디촌 아파트 건설현장
《알라디는 도시와 멀리 떨어져있고 정거장도 없어 교통이 아주 불편합니다. 길림-할빈 고속도로가 우리 마을 옆을 지난다고 하지만 그것은 5년후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기술인재가 결핍합니다. 능력있는 사람들은 대도시나 한국기업으로 가버려서 부득이 한족기술자를 초빙하는 상황이랍니다. 다음으로 자금난입니다. 우리는 국가 대부금이 1,200만밖에 안됩니다. 기업을 확대하려니 많은 자금이 필요되지요. 해당 부문과 국내외 벗들이 알라디에 적극 투자해주길 바라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악전고투하여 자체의 힘으로 우리의 목표를 실현할것이며 또 할수 있습니다.》

김규삼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알라디에서는 2년에 한번씩 촌민운동대회를 가지는데 1994년 9월에 있은 운동대회에서는 남녀로소가 한복을 입고 검열식을 하고 집체무를 추었는데 대회가 시작되여서부터 끝날 때까지 나흘동안 내내 운동장 상공에는《알라는 좋아요. 살기가 좋아요.》라는 프랑카트가 기구(气球)와 함께 걸려있었다고 한다.

송화강은 사나이 강이다. 락차가 큰 험요한 수로를 사나이의 용맹과 지혜로 달리던 상류 송화강은 여기 알라디에서부터 사나이의 넓은 흉금과 깊은 웅심을 안고 끝없는 광야를 넓은 강폭과 깊은 수심으로 유유히 흐르고있는것이다. <계속>

정리: 이정희 기자 lumiere0620@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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