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탑세프어워드

[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28장 시골 몸살이(1)

기사입력 2018-11-08 09:23:41 | 최종수정 2018-11-08 09:27:36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본문 첨부 이미지
1990년, 제4차 전국 인구보편조사 통계에 의해 0~19세 남녀비례가 107:100다. 장차 20년 후 신부가 1,586만명 부족할것으로 예견한다. 그런데 남녀비례가 실조되지 않은 현실에서 농촌에는 처녀가 기본상 없어 총각들은 떠꺼머리로 늙어가는 실태이다. 료녕성 관전현 보산촌에는 혼령 총각이 18명이나 되지만 처녀는 겨우 7명인데 그나마도《보류하기 힘들다》는 시각이다. 관전현 하로하조선족진 천구촌에는 총각들만 득실거리고 마가자촌에는 혼령 총각 14명중 28세이상 로총각이 6명이다. 40세가 넘은 한 로총각에게 나이를 물었더니《이제 15년이면 환갑이외다》라고 쓴 대답을 했다. 70년대에는 인품만 좋아도 장가를 들수 있었다면 80년대에는 인품에다 돈이 있어야 했고 90년대에는 인품 좋고 돈 있어도 시골 총각은 장가를 들수 없다. 료녕성 개원시 시교의 조선족촌들에서는 5, 6년내 장가를 간 총각이 한명도 없어서 해마다 상급기관으로 부터《계획출산모범촌》으로 되고있단다.
한국에서는 정부와 대통령 부인이 직접 나서서 시골 로총각과 홀아비들을 장가 보내려고 타국으로부터 신부를《수입》하기도 하지만 경제가 락후한 중국에서는 그 길도 통하지 않는다. 혹간 강건너 조선의 처녀와 눈이 맞아 데려다 사는 사람도 있다는 말도 돌았지만 그럴 경우 중조국경협약에 따라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되여 있어 숨어서 사는데 뜨거운 부뚜막에 오른 백개미마냥 안절부절한다는것이고 아이를 낳아도 호적에 올릴수가 없어 살수록 적막강산이라는 것이다.

《강건너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남자는 거의 없고 거지반 녀성이더라. 조선에서 섭외혼인을 허락한다면 우리 마을 총각들도 장가를 들련만…》

로총각을 가진 부모들의 공통된 심리를 대변한 말이였다.

《요즘 촌장들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대부금이 문제가 아니다. 처녀들을 한 트럭만 실어다 달라. 장가 못간 로총각들이 술잔과 키스를 하면서 시들어가고있다. 밭이 있어야 씨 뿌리고 농사를 지을게 아닌가〉예요.》

길림성 집안시 양수조선족진 민족사무원 송창철(36세)씨는 롱지거리처럼 한마디 했으나 웃음이 나가지 않았다.

현재 중국의 13억 인구는 12억무 경작지의 소출로 살아가고있다. 땅을 다루는 농촌의 로동력은 4억 4천만, 매 로력 당 2.7무에 조금 꼬리가 달린 농토에 매달려 있는데 농촌의 여유로력은 1억 2천만이나 된다는 국가농촌발전연구센터의 통계가 있다. 목전 정부에 신고를 한 류동인구는 8천만이다. 신고를 하지 않은 망류(盲流)까지 포함하면 1억 인구가 류동하고있다고 쉽게 넘겨짚는다. 중국사회가 안정되자면 바로 이러한 농촌 여유로력의 출로를 개척하는것인데 도시는 또 도시대로 2천만 실업대군이 아우성을 지르고 해마다 수백만 청년들이 취업대기하는 실정이라 난장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 1979년부터 1993년말까지 15년동안에 전국 종업원수는 9,966만으로부터 1억 4천만으로 장성하였는데 그중 2천만 농민이 로임수입을 생활원천으로 하는 로동자계급의 성원으로 되었다.

료녕성 개원시 조선족촌의 인구당 수입은 2,500원이다. 촌민 가정수입의 증장원인은 농사수입보다도 도시진출과 출국붐의 혜택이 크다고 한다. 소구사촌만 례로 든다면 203세대에서 230명이 한국에 다녀왔거나 한국 체류중이다.

도시진출과 출국붐과 더불어 늘어나는것은 로총각과 홀애비 대오. 처녀는 물론 30대의 녀인들도 촌에서 자취를 감추고있다. 도시로 온 녀성들은 대개 식당과 유흥업소에 취직을 한다. 북경에서 적발된《유흥업소》에 있는 조선족아가씨의 수자는 7천명이란다. 전국적으로 그러한 조선족아가씨가 3만이 훨씬 넘을것이라는 설이 자리를 굳히고있다. 농토가 적어 도시로 몰려들어 품팔이를 하는 농민들을 두고 중국에서는 농민공(农民工)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선족의 경우는 성질이 다르다. 농토가 없어서가 아니라 땅을 버리고《무작정 상경》하는 식이다. 개원시 양목림자향 신흥촌(开原市杨木林子乡新兴村)에 150세대 있는데 출국과 도시진출한 세대가 50호다. 이런 가정들에서 양도한 350여무의 밭을 외지의 한족들이 이사 와서 부치고있는 실정이라 순수한 조선족마을의 민족구성에 일대 변혁이 생겼다.

시인 김철우씨는 현실 농촌의 화폭을《갈 사람은 죄다 떠나고 / 늙고 병들고 여위여 / 앉은 자리 지켜선 옷자락에 / 어린것이 매여달려 칭얼거리고…》(《홀애비촌》에서)《맏며느리는 엊그제 / 도회지 식당에 / 뼈돈 벌러 떠나가고 / 둘째 며느리는 오늘 / 짠지장사 합신단다 / 고독하게 남은 / 고령의 삼촌 양주 / 썰렁한 초가집 / 구석을 지켜간다》(《처삼촌》에서)《어느 식당인가 술집인가 / 농촌새기 복무원으로 쓴답시고 / 밤마다 색정봉사로 / 돈을 마대들이 끈다는 / 거짓 아닌 현실…》(《바라는 마음》에서)이라고 탄식 섞인 현실 농촌 화폭을 그리고 있다.

김홍철씨는 수필《이별의 쓰라림》에서 농촌 처녀총각의 사랑의 파멸을 이렇게 쓰고 있다.

- 그녀는 이제는 부득불 떠나야 한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제 우리 둘 사이 무슨 말을 더 하랴? 다만 내 귀전에는 그녀의 리별의 리유만 쟁쟁하다.

《촌구석에서 눈곱만한 책임전에 매달려 사느라니 얼마나 고달파요? 도시로 떠나겠어요.》

남들이 다 떠나가는 도시로의 진출이다.

심양시 서탑거리(西塔街) 조선족백화상점 뒤골목과《로씨야공원(쏘련홍군렬사묘)》앞거리는 조선족로무시장으로 변했다. 매일 동북3성에서 몰려온 조선족 6~8백명이 복새판을 이루고있다. 70% 이상은 녀성이고 남성은 겨우 4분의 1정도였는데 남성로무자들은 올해 들어 급작스럽게 늘어났다고 한다.

《계집애란 계집애는 병신 내놓고 다 도시로 가버려 련애를 하재도 대상자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도시로 묻어온거지요.》

관성희라는 젊은이의 솔직한 고백이였다.

로무대기자들은 대개 장끼는 없다. 구직요망을 들어보면 남성들은 음식점, 술집 심부름군이 아니면 한국 기업에 가 막로동을 하는것이고 녀성일 경우는 음식점을 원하고 처녀들과 젊은 여성들은 술집아가씨가 소망이였다. 심양시에 있는 한족로무시장의 한족로무자들은 거의가 목공이나 미장공이 아니면 선반공 등 자기의 장끼를 홍보하는 패쪽을 들고있는데 반하여 조선족들은 두 주먹뿐이니 가슴 아픈 실태이다.

취직범위가 좁은것만큼 일자리 찾기도 곤난해서 한달남짓 헛물만 켜고 앉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서탑주위의 개인집을 세맡고 10~20명씩 마루바닥에서 쪽잠을 자는 형편이지만 하루에 20원씩 소모하다 보니 호주머니가 거덜이 난지가 오라다면서 눈물을 짓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도 녀성들은 천성적인《밑천》이 있어서 새벽 5:30분부터 저녁 8:30분까지 영업하는 심양시조선족예술관 무도장으로《출근》하는 직업무녀로 전락하고 있다.

흔히 온밤 주숙지로 돌아오지 않는 녀인들이 태반이라며 로무자 김월선녀성은 그녀들의 가긍한 처지에 눈물을 지었다.

심양시 소가툰구 어느 한 술집에서 아가씨로 있는 송씨 녀인(29세)은 료녕성 신빈현 어느 농촌에 있는 본가에 딸애를 떼여두고 집을 떠나오게 된 경위를 말한다.

《시집을 가서 식당을 꾸렸어요. 그런데 그만 밑지고 나앉았지요. 빚을 갚자면 한국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로무에 돈을 넣었는데 또 3만원을 사기당했지 뭡니까. 로무길이 막히자 위장결혼으로 한국으로 가려고 고리대를 맡고〈가짜 리혼〉을 했는데 그번에도 돈만 떼우고나자 정말 갈라지지 않으면 안되였지요. 리자만 해도 매달 800원이예요. 술집에 와서 팁을 벌지 않으면 안돼요.》

압록강류역의 료녕성 모든 술집에서는 손님의 요구에 좇아 아가씨 동반 식사를 하면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는것이 특징이다. 음식점이자 노래방이고 무도장이 되는것이다. 보통 팁은 100원. 매음은 법적으로 금지되여 있지만 일단《슬슬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남성들이 밖으로 꼬여낼 때의 팁은 따로 곱절 붇는다고 한다.

《한달에 술자리에서만도 3, 4천을 올려요. 그런데 돈이 안남아요. 지금 돈이 맥이 없지요. 아가씨 생활이 진저리가 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도 있어요. 그런데 일단 고향에 가면 모두들〈정파답지 못한〉사람으로 대하는 눈치예요. 술집 아가씨였다면 몸 파는 기생쯤으로 착각하는거지요.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는겁니다. 내친 걸음인데 될대로 돼라 하고 인생을 살다보면 대안이 나지겠지요.》

심양시 서탑거리 어느 한 술집 아가씨의 말이였다.
도시에 온지 6년이나 되는 김영복씨의 고달픈 인생살이를 들어보자.

본문 첨부 이미지
《21살 어린 나이에 도시로 들어왔었답니다. 시교에 한달 30원씩 하는 남의 집 웃방을 세맡아 들고 공장에 출근을 했지요. 월급은 200원. 술담배를 안하는 축이라서 그럭저럭 살아갈수는 있더군요. 그런데 3년만에 결혼을 하니 고만한 돈으로 살아간다는건 턱도 없는 수입이더군요. 그렇다고 시골로 돌아갈 수도 없지요. 도급맡은 땅을 남한테 주어버렸으니깐요. 이듬해 안해가 사영공장에 출근하고 나도 퇴근하면 삼륜인력거를 몰며 수입을 늘였답니다. 도시에 들어온 6년동안 너무나 고달팠고 치른 대가가 너무나 커요. 돈 한푼 모으지 못하고 근근득식으로 살아가는 형편이라 자초에 도시로 온것을 가끔 후회하기도 하지요. 고향 땅에서 이만치 열심히 일했다면 아마 지금쯤은 부자가 되였을 걸요.》

개혁개방은 녀성들로 하여금 전 세대 어머니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부유와 자유를 찾아 분분히 도시로 떠나게 하였다. 그녀들을 묻어서《말끔한》총각들도 고향을 등지고있어 시골은 나날이 황페해가고 있다.

연해지구의 발달한 농촌은 도시청년들을 유혹하여 도시에서 처녀들이 시집을 온다고 하지만 압록강류역의 시골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몸살이에 울고있는 시골에서 처녀들은 날아난 꾀꼴새요, 총각들은 떨어진 송충이로 된 현실이니까. <계속>

정리: 이정희 기자 lumiere0620@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 봉황망코리아미디어 &chinafocu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혈연의 강들 
봉황망 중한교류채널 바로가기 베이징 국제디자인위크 기사 바로가기

차이나포커스 Q&A 배너
경한 배너
기사제보 배너
윤리강령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