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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18장 뿌리의 신화(1)

기사입력 2018-09-13 09:17:13 | 최종수정 2018-09-13 09: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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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1일, 료녕성 철령시(铁岭) 성주 리씨 수십명이 조상의 사당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자기들의 선조인 리성량(李成梁 1526-1615년), 리여송(李如松 ?-598년)을 추모하는 활동을 거행했다.

성주 리씨는 조선반도에 있는 리씨성 241개 본중에서 전주, 경주 리씨 다음으로 큰 성씨이며 시조는 신라의 재상 리순유이다. 대대로 조선반도에서 살아오던 성주 리씨의 한가닥 줄기가 중국으로 뻗어오게 된 때는 명조 홍무년간이였다. 지방관리였던 리순유의 15대 후손 리영(李荣)이 죄를 짓고 무서워 아들 넷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료녕 철령지구로 피신을 왔던것이다. 그는 명조의 군대에 들어가 포화속을 누비며 여러차례 군공을 세우고 철령위 지휘검사로 승진하였다. 그때로부터 성주 리씨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서 망명후의 제5대손 리성량에 이르러 휘황찬란한 부흥을 이루었다.

《철령현지》의 기재에 따르면 리성량은 자가 여기이고 호가 은성이며 명나라 가정 5년에 철령성의 견화루(오늘의 철령시 은주구 채하가 구원거리 서쪽)에서 태여났다.

《중국을 찾아온 조선의 옛 사람들》(유수인 저)이라는 책에서 리성량을 이렇게 적고 있다.

- 리성량은 군사에 밝았으나 빈곤하여 선조의 관직을 계승하지 못하고 나이 40이 되도록 여전히 서생으로 있었는데 순안어사가 그의 재질을 중시하고 비용을 대주어 입경시켰더니 거듭 공적을 나타내여 료동 험산참장이 되였다. 명나라 륭경원년(隆庆元年)에 토착종속이 영평에 대거 래습하매 리성량은 이를 구원하는데서 공을 세우고 료동부총병(辽东副总兵)으로 승급했다.

그후 몽골과 녀진족을 쳐서 대승을 거듭하고 만력2년(1574년)에 료동의 최고 군사지휘자인 료동총병 녕원백(宁远伯)으로 되였다. 명나라 신종황제는 그의 공적을 갸륵히 여겨 류주 광녕성(柳洲光宁城 오늘의 료녕성 北宁市)에 사당 한채를 짓게 하고 북경에다도 호화로운 저택을 하사했다. 리성량은 전쟁에서 대승전을 한것만도 10차로서 중국 력대의《10대 군사가의 한사람》이라는 후세의 평가를 받고 있다.

북녕의 옛명은 북진인데 료녕성 금주 부근에 있다. 1995년 11월, 우리 일행 셋(무순시안전국의 리봉국, 한국인 김명국 그리고 나)은 료양에서 아침 일찍 북진을 바라고 길을 떠났다. 가도 가도 지형변화가 없는 가없는 벌이였다. 오르고 내리는 멋도 없고 단풍이 타는 압록강연안의 산구처럼 볼만한 산도 없는 따분한 료동벌을 일찍 2백년전에 연암 박지원은 이렇게 묘사했다.

- 지세를 살펴본다면 펀펀한 둔덕이 어쩌다가 몇길 남아되는 둥그스럼한 언덕으로 되면서 여기서는 하늘을 쳐다보나 땅을 굽어보나 가도 끝없어 해와 달이 지고 새고 비바람이 불고 개는 변화가 죄다 이 판국속에서 벌어지고있었을뿐이다. 동쪽으로 바라다보면 강남땅이고 산동땅이고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있을것이로되 다만 안력이 미치지 못함만 안타까울뿐이였다. (《열하일기》의《북진묘견문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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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심전역 당시 격렬한 전장터였던 흑산은 산이라기보다 평원에 우뚝 솟은 자그마한 언덕이라 하는 편이 훨씬 격에 맞을것 같았다. 흑산에서 택시로 한시간 반 거리에 있는 북진은 의무려산아래에 있다. 반은 옛모습을 그대로 안고있는 도시의 거리에서《그 번화한 품은 료동》에 못지 않았다고 한《열하일기》의 묘사에 수긍이 갔다. 박지원이 본 당시의 모습은 많이 볼수 없고 다만 당시 성북쪽에 있었다는 녕원백 리성량의 패루는 거리 중간에 그대로 있었다. 길 량켠에는 웅대하고 정교한 짐승모양 조형들이 있고《료녕성문물보호단위》라는 글을 새긴 세멘트패도 길옆에 세워있었다.

들은바에 따르면 이곳은 기자의 봉지로서 관을 쓴 기자의 목상도 있었다는데 가정년간(1522-1566)에 타버리고 지금은 명신종(明神宗)이 명하여 명만력(明万历) 8년(1580년)에 세운 리성량의 공적비(石坊)가 북녕시에 광휘로운 력사적 이채를 돋구어주고있다. 적갈색의 돌을 깎아 만든 공적비의 높이는 9m, 너비는 13m이고 네개의 기둥에 3층 루각형국이다. 맨 웃층 중앙 기둥에는 세로《세작(世爵)》이라는 두글자가 새겨져있고 그아래에는《천조고권(天朝诰券)》《진수료동총병 겸 태자태보녕원백 리성량(镇守辽东总兵兼太子太保宁远伯李成梁)》이라는 글발과《만력 8년 10월 길일립(万历八年十月吉日立)》이라는 글이 량켠에 똑같이 새겨져있다. 그리고 룡문을 뛰여 넘는 잉어며 여의주를 굴리는 룡이며 사슴과 꽃, 사람이 산것처럼 생동하게 조각되여 있었다. 그리고 중간의 두개의 기둥앞에는 돌사자 한쌍이 정교하게 만들어져있었다. 이 공적비는 1963년 9월, 료녕성 성급문물로 되여 공적비옆에 표적돌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옥돌을 깎아서 만든 패루는 멀리서 보기엔 성문같아보였다. 돌을 깐 길로 인파가 흐르고 량옆에 촘촘히 들어앉은 고옥들은 식당이며 상점이요 하는 각가지 패쪽을 달고 싸구려를 불러댔다. 길을 가로 질러 석자 높이의 돌기둥을 박아서 그 사이로 밀차만이 간신히 통할수 있었다. 사람들이 입은 복장이며 자전거가 아니라면 옛 관녕의 복사판이라 할수 있을것이였다. 붐비는 사람들속을 지나면서 나는 당시 총병관이였던 리성량의 행차가 닥치면 량옆에 엎드려 숨들을 죽이였을 어마어마한 권력의 힘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리성량이 죽은 후 아들중에서 여송, 여백(如柏), 여정(如桢), 여장(如璋), 여매(如梅)는 모두 총병관을 지냈고 여자, 여오, 여계, 여남도 참장에 이르렀다. 장자 여송은 임진왜란이 나자 제독(提督)으로 방해어왜총병관(防海御倭总兵官)이 되여 군사 4만을 인솔하고 압록강을 넘어 평양성을 되찾고 평안, 황해, 경기, 강원 4개 도를 광복했다. 여송이 출정하기 앞서 리성량은《조선은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특별히 류의하여 진력하라.》고 간곡한 당부를 했다고 한다. 도독합사직에 있었던 여백도 선봉장으로 평양을 치고 곧장 개성으로 강행군해서 함락했다. 여매 역시 좌군을 인솔하여 울산을 공격, 형을 대신하여 왜구를 방어하는 총병관으로 있었다.

당시 리씨가문의 세도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는것은 만력16년 어사 임양심이 여백을 경계하여 황제한테 올린 글월에서도 볼수 있다.

《- 리씨 부자의 병권이 대단하고 그 밑의 인척들로 하여금 각기 병력을 장악하게 하여 도읍을 둘러싼 수천리 땅을 든든히 차지하고는 임의로 세도 부리며 리여백이 또한 방종무도하기가 짝이 없은즉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변괴가 생길 우려가 있나이다.》

당시 리씨가문의 권세와 사치를 나는 또 료녕성 철령시 소툰촌에 있는 리성량의 묘지에서 보았다. 소툰촌에서 서쪽으로 1리 떨어진 서산에 리성량의 시신이 묻혔었다. 자그마한 언덕이나 다름없는 산기슭에 돌조각 사자며 장수며가 두줄로 대칭되게 줄느런히 선것이 비록 규모는 작아도 북경의 팔달령으로부터 정릉으로 가는 사이의 선도(仙道)를 방불케 했다. 조각이 끝나는 곳에 종각이 세워있고 종각안에는 대리석 비석이 세워졌는데 그것은 1994년에 리씨종친회에서 모금을 해서 세운것이였다. 우리를 안내한 젊은 리씨 청년은 비석뒤켠 산자락에 있는 봉분을 가리키며 리성량의 묘지라고 설명을 했지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 리씨들이 조상에 대한 관심이 생긴것은 근간의 일이고 또 력사적으로 누르하치가 리성량의 묘지를 파엎었다는 설도 있기때문이였다.

철령 리씨종친회가 세워진것은 한중수교이후의 일이였다. 물론 조상에 대한 숭배심이 없은것은 아니겠지만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지위가 오르지 않았다면 오늘같이 조상에 대해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건국이후 사회주의사회에서 조상보다도 계급 우애를 더 중히 여겼고 아울러 리성량과 같은 봉건착취계급을 조상으로 모신다는것은 천추에 용서 못할 죄악이였던 것이다.

우리는 한낮 때에 소툰촌에 이르렀다.
2백여호에 천여명 인구를 가진 소툰촌에는 열에 일여덟은 리씨였다. 우리가 리성량의 묘지를 묻자 한창 탈곡을 하던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대뜸 조선족인가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기들도 호적은 한족으로 되여있지만 한국 성주 리씨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한국으로 다녀왔는가, 성주가 어떤 곳인가, 한국이 대단히 발전했다는데 참으로 자랑스럽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달갑게 길안내를 나서기도 했다.

철령현 부현장으로 있다가 퇴직한 철령 리씨종친회 리유한(李有汉)회장은 말한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나도 뿌리가 조선이라는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족으로 자처해왔습니다. 집안 로인들이 가끔 리성량이야기를 하면서 성주가 본이라고 말할라치면 나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핀잔주기도 했었답니다.
그러다가 서울 올림픽을 보고 난 후로는 저도 모르게 술좌석에 가면 성주이야기를 꺼내게 되더군요. 그전엔 창피스럽게 여겨지던것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퇴직을 하자 나는 집안의 좌상들과 상론하고 종친회를 만들었고 리성량의 묘비도 세웠습니다.
묘지자리는 문화대혁명전에 비석이 있었던 자리를 짐작하여 정했는데 앞으로 확인해야 할것입니다.》 <계속>

정리: 이정희 중국 전문 기자 limiere0620@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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