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7장 력사의 현장(3)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7-12 09:32:29 | 최종수정 2018-07-11 11: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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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태왕비

집안시(集安市)는 광서 28년(1902년)부터 1965년까지는 집안현(辑安县)이였다. 세월을 소급해 올라가면 압록강 중류의 오른쪽 대안을 통구(通沟 - 옛날 이름은 沸流谷)였다. 기원 2년부터 기원 427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기까지 고구려시대엔 국내성이였다. 지금도 굵직굵직한 고구려의 유적들을 든다면 호태왕비(好太王碑), 국내성, 환도산성,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 장군총(将军塚), 태왕릉(太王陵), 염모묘(苒牟墓), 각저묘(角墓), 무용묘(舞踊墓), 삼실묘(三室墓), 마조묘(马槽墓), 오회분4호묘(五坟四号墓), 오회분오호묘(五坟五号墓), 사신묘(四神墓), 장천1호묘(长川一号墓) 등을 손꼽을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것은 호태왕비이다.

기원 414년에 고구려 20대 장수왕(长寿王)이 부왕《국강광개토경평안호태왕(国冈广开土境平安好太王)》의 공적을 기리여 세운 묘비이다. 높이가 무려 6.39m이고 방주형(方柱形)이며 밑부분의 너비가 1.34~1.97m, 웃부분의 너비가 1~1.60m, 세번째 면의 가장 넓은 곳이 2m나 된다. 1,755개의 한자가 새겨진 이 거대한 비석은 천연 각력회암석(角砾恢岩石)으로 되였는데 당시 기중기도 없는 사정에서 어디에서 어떻게 옮겨 왔는지 막연한 수수께끼가 아닐수 없다. 전설로는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옛날 백두산 천지에 기거한 한쌍의 거룡(巨龙)부부가 백두산일대의 가물과 장마를 주관했다. 거룡은 처음엔 고분고분 천제의 분부를 들어왔으나 점차 들먹어 기분파가 돼버렸다. 기쁠 때면 적당히 비도 주고 볕도 보냈지만 일단 성이 나면 장마나 가물을 떠안겼다. 어느날 천신(天神)이 이를 알고 령험한 부처석(夫妻石)을 천지에 보내여 거룡부부를 감시하게 했다. 그때부터 거룡부부는 온순해졌다. 어느 하루, 거룡부부는 고구려 도읍 국내성이 번화하다는 말을 듣고 아름다운 처녀로 변신하여 구경을 왔다. 처녀를 본 국왕은 비자(妃子)를 삼으려고 건장한 무사 백명을 보내여 돼지피를 뿌렸다. 당황한 황룡은 홀몸으로 돌아갈수 없어 압록강에 투신자살했단다. 바로 투신한 곳이 현재 집안시 황백향(黃柏乡)경내에 있는 너비 50, 길이 천여m 되는 악룡도(恶龙岛 현재 이름은 军舰岛)라고 한다. 그후 고구려 19대왕이 죽자 아들 장수왕은 태왕릉에서 동으로 200m에 있는, 돌로 굳어진 암룡의 몸에 고구려의 건국력사와 부왕의 공적을 새겨 고구려의 진국지보(镇国之宝)로 삼았다고 한다.

광개토대왕(374-12)은 고구려 력사상 28대 왕중에서 드물게 보는 영걸이였다. 391년 즉위년에 서북의 연(燕)과 싸우고 백제를 쳐서 신라를 구했다. 그리고 래침한 왜구를 격파하고 그 세력을 사방에 확대했다. 404년 다시 왜구와내통한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의 청을 받아들여 군사를 남하시켜 일본군과 정면충돌로 패주시켰다. 그리고 동북땅을 완전히 장악하고 한강이북 땅을 통합시켜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시조 동명성왕을 태양신의 아들로 삼아온 고구려 사람들은 궁전, 집, 묘지 등을 오전, 오후 다 해빛을 받도록 지었던바 장수왕 역시 호태왕비를 동남향 혹은 서남향으로 세워서 오전이면 동남, 오후면 서남으로 해빛 목욕을 하도록 세웠다. 그래서인지《장검으로 세기를 열어가던 영광의 시대는 빨리도 지나》가고《반석같던 옛나라는 깨여지고 사나이다운 민족은 력사에서 실종되였》(조룡남 작《실종된 민족》에서)지만 그 공적은 후세인의 심령속에 살아남아 도처에서 흔적을 찾아볼수 있다. 집안시에는 태왕향(太王乡)이 있는데 향구역내에 호태왕릉과 호태왕비, 장군총, 통구 옛무덤군(通沟古墓群) 등이 있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안역이 있어서 조선 만포시로 오가는 국제렬차가 여기에서 발차의 고동을 울린다. 집안해관, 변경검사참, 대외무역운수회사집안판사처, 집안위생검역소, 집안동식물검역소 등 국가 주재기관과 집안에 주재하는 조선국제종합운수사무소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태왕릉을 마주하고 태왕조선족소학교가 있어서 한결 깊은 뜻을 안겨주는듯 싶었다. 그리고 시내 거리를 거니노라면 심심치 않게《태왕상점》,《태왕식당》,《태왕가라OK》,《태왕병원》등을 볼수 있다. 1천 6백여년전 일국을 호령하던 대왕의 이름이 오늘 시장경제시대에 간판의 이름으로 탈바꿈한 셈이여서 이런 상점이나 식당에 들어갈 때면 어쩐지 대왕님의 품에 얼싸 안기는 그런 묘한 기분에 젖기도 한다.

나라는 망해도 력사는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1992년, 료녕성 무순시교의 한 조선족향에서 단오명절 운동대회를 할 때 세개팀에서 구류와 륙상경기를 했는데 매개 팀의 이름은 각각 고려, 신라, 백제로 출마했다고 한다. 운동대회 개막식 때 각 팀은 고려, 신라, 백제라고 쓴 기발을 들고 검열식을 가졌고 2일간의 대회기간에는 각 팀의 응원대는 옛 삼국의 이름을 웨쳤는데 그때처럼 경기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때는 없었다고 당시 참가자들은 회억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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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태왕비
고구려가 망해서 천여년후, 청나라는 백두산을 성조발상지지(圣祖发详之地)로 보고 강희 16년(기원 1677년) 봉금지로 만들었다. 그때로부터 201년동안 집안은 인적없는 불모지로 되였고 고구려 묘지와 비석도 풍우에 씻기고 폭풍설에 시달리며 숲속에서 청태를 덮쓰는 비운을 맞았다. 광서 3년(1877년) 통화현, 회인현(오늘의 환인현)이 설치되였는데 회인현 첫 설치위원(设治委員) 장월(章越)의 서계(书启 오늘의 文书) 관월산(关月山)이 석공출신이였다. 그는 옛 묘지와 고적을 찾아다니던중 패왕초에서 통구에 이르러 동강의 숲속에서 청태에 덮인 석주를 우연히 발견했다. 손으로 쓰다듬어보니 비문이 있는지라 그때부터 호태왕비는 다시 볕을 보게 되였던것이다.

관월산은 장월의 허락을 받고 광서초년에 산동성 문등현(文登县)에서 통구전자에 이사하여 동강대비(东岗大碑 즉 호태왕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는 어린 아들 초균덕(初均德)을 데리고 사는 초천부(初天富)를 고용하여 비석의 청태를 없애게 했다. 초천부는 매일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청태를 벗겼는데 일축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소똥을 바르고 마른 다음 불을 달았는데도 씨원치 않자 기름을 치고 불을 달았다. 과연 청태는 모조리 타버렸는데 가석하게도 돌이 금이 가고 터져 어떤 글자는 모호하여 알아볼수 없었다. 현재 비석의 1면에 16자, 2면에 25자, 3면에 81자 등 모두 122자가 그때 사라진것이라는 말이 있다.

뭇별이 반짝이는듯 비문이 나타나자 성경(오늘의 심양), 흥경(오늘의 신빈) 등지에서 고고학자, 금석학자(金石学家)들이 물밀듯 찾아들었다. 초천부는 명을 받고 창호지(窗户纸 즉 毛头纸)로 탁본을 만들었는데 글자가 똑똑하지 못한것은 원 모양대로 다시 쪼아서 찍었다. 비문탁본은 현아문과 고고학자들한테 바친외에 나머지는 팔아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는데 성경과 안동(오늘의 단동) 사람들은 천씨한테서 사다가 다시 외국인(주요하게는 일본인)한테 되넘겨서 폭리를 얻었다.

광서 28년(1902), 집안현(辑安县)이 서자 제1임 지현 덕개(德凯)와 제2임 지현 오광국(吴光国)은 초천부한테 비문탁본 허가증을 주었는데 탁본 웃머리에 초씨의 사진을 박아 현아문에 바친 일정한 수량외는 사사로이 매매를 하도록 했다.

30여년을 호태왕비에 붙어살던 아버지가 죽자 그 아들 초균덕이 그것을 이어받았다. 민국년간에 탁본을 대량 만들었는데 매일 한면씩 나흘에 하나씩 생산한 셈이였고 탁본 하나의 값이 당시 대양(大洋) 10원, 소양(小洋) 12원이였다. 초균덕은 탁본으로 이름이 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초대비(初大碑)라고 불렀다고 한다. 1939년 70여세된 초대비는 더는 일을 할수 없게 되자 통구전자의 땅과 집을 팔고 청석진(青石镇)으로 이사하여 만년을 보내다가 1946년에 세상을 떠났다.

광서 33년(1907)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57련대장 오자와 토크헤이(小泽德平)는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와 당시 집안 지현(知县) 오광국(吴光国)을 만나 호태왕비를 팔라고 청들었다.

그에 앞서 강을 건너와 비석을 보고 비문에 고구려와 왜구(倭寇)간의 전사(战事)기재가 있는것을 본 그 자는 비석을 사다가 일본 국립박물관에 수장할 꿍꿍이였던것이다. 진사출신이고 연박한 학식을 가진 오지현은 고구려 력사의 문명진실의 견증인 국보를 판다는것은 천추에 용서 못할 죄악임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때 오지현과 오자와 토크헤이의 대화를 사료는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이 비석은 대단히 무거워 도저히 일본까지 운반할수가 없습니다.》
《그거야 쉽지요. 우리의 병선이 이보다 훨씬 더 무겁지 않습니까요? 병선으로 옮기려 합니다.》
《이 비석은 지방에 있지만 국보입니다. 나는 지방의 보잘것 없는 관리인데 어찌 나라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리할수 있겠습니까. 각하께서는 교양이 깊은 분이신데 나의 고충도 리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사실 저는 문물에 흥취가 있답니다. 부르는 대로 돈을 드릴테니 지현께서 양도하시지요.》
《각하께서 그처럼 흥취를 가지고 계신다면 나한테 탁본 몇개가 있으니 선물로 드릴게요.》

오광국은 하인을 시켜 탁본을 가져다주었다. 대답이 궁해진 오자와 토크헤이는 말문이 막혀 돌아갔다.

만주사변이후 일제는 동북을 강점하고 저들의 천하를 만들었는데 어이하여 호태왕비를 그대로 두었는지 의문스럽다. 아마 만주국은 물론 전반 아세아가 저들의 소유로 된다고 믿었던 탓일가?

1925년 집안 지현 류천성(刘天成)은 모금을 해서 높이 석장, 너비가 한 장 다섯자 되는 비정(碑亭)을 세웠는데 목조건물이라 반세기가 지나자 풍우에 침식(侵蚀)되였다. 그리하여 1982년 집안현문물관리소에서 성의 비준을 거쳐 다시 지었다.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이며 고고연구소 소장이며 저명한 고고학자인 하내(夏乃)가《호태왕비》라는 편액을 썼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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