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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7장 력사의 현장(2)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7-10 09:10:18 | 최종수정 2018-07-10 09:2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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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충신 뉴우(纽由)가 가짜로 투항을 하고 선물을 갖고 적진에 가서 선물을 바치면서 칼로 적장을 죽이였다. 적의 진영이 혼란에 빠졌을 때 고구려 대군이 진공을 해서 위나라 군사를 대패시켰다. 국왕은 뉴우의 공을 기리여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이 청조 광서 30년에 길을 닦던 사람들한테 발견되여 지금 료녕성 박물관에 수장되여있다.

집안시에서 북으로 5리에 상거한 환도산성이 있는데 옛 이름은 위나엄산성(尉那严山城)이다. 산성은 자연조건을 충분이 리용하여 건축했는데 한사람이 지키면 만인을 당할수 있는 지세였다. 동, 서, 북은 반원형의 산곡에 성벽을 쌓았는데 자연석으로 이루진것으로 길이가 14리나 된다고 하지만 중국의 만리장성에 비하면 초라하기가 짝없어 국력의 빈약을 엿볼수 있다. 환도산성에는 음마만(饮马湾)이라 하는 연못이 있는데 지금은 말라서 물 한방울 볼수가 없으나 그 당시엔 80㎡나 되는 못이였다고 한다. 대무신왕(大武神王) 11년 7월, 료동태수가 황제한테 알리지도 않고 고구려를 쳤다. 대무신왕의 백만대군은 국내성에 이르렀으나 사람은 물론 개, 돼지 한 마리 지어 낟알 한알 얻지 못했다. 급급히 환도산성을 쳤으나 거듭 실패했다. 고구려는 싸우지 않고 산성을 고수했다. 적병은 군량이 떨어지고 물까지 없었다. 동시에 환도산성에서도 량식이 절단이 났다. 그러할 때 시종이 잉어 한마리를 들고 왔다. 을두지(乙豆智)가 음마만에서 잡아온 물고기를 보고 묘책을 세웠다. 을두지는 왕의 허락을 받고 련꽃 잎에 잉어를 싸서 성외 병졸들한테 상으로 가져가게 했다. 성내에 량식도 없고 물도 없는줄로 알고 투항을 기다리던 적군은 그것을 보고 퇴각했다.

1986년, 나는 청년 문우들과 함께 산을 톺아 환도산 허물어진 성벽에 올랐다. 때는 찌는듯한 삼복이라 풀이 돋고 청태가 낀 돌성벽은 퍼렇게 멍이 든듯 나의 가슴을 허볐다.《얼마나 많은 장검이 이 성돌에 동강나고 얼마나 많은 화살이 이 성돌에 부러졌으랴.》(조룡남 작《환도산성에 올라》에서)

집안시 경내에는 지금 7, 800여개의 옛 무덤이 있다. 마치도 바둑판에 바둑알을 촘촘히 놓은듯한 묘지들은 집안시 3개 진 17개 향 곳곳에 널려있다. 력대 국왕의 묘지가 있는가 하면 고관대작들과 귀족들과 평민백성들의 묘지들이다. 저 묘지속에 잠든 해골들은 그제날에는 피와 살이 붙어 펄펄 날뛰면서 반석같이 고구려를 지켜왔으리니 창업의 력사는 길이길이 영원하리라.

고구려 력대의 국왕이며 고관대작이며 귀족과 평민들이 묻힌 국보에 속하는 묘지들은 세월의 흐름속에 많이 파괴되고 도굴을 당했다. 이런 묘지들중 가장 일찍 파괴를 당한것은 서천왕릉(西川王陵)이였다. 서천왕릉은 집안시 마선향 경내에 있었다. 왕릉은 대단히 컸는바 그 면적이 무려 3무다. 벌써 오래전에 봉변을 당해 지금은 중간이 갈라져서 멀리에서 보면 량쪽으로 파헤친 묘지는 두개의 언덕을 이루었고 내부의 문물들은 거덜이 나고 없다. 파헤쳐 드러난 돌중 가장 큰 돌은 무려 30톤에 달한다. 오랜 세월 풍우속에 검은 갈색으로 변해버렸지만 모두 정밀하게 다듬어진은 화강암의 본색은 그대로 남아있다.

봉상왕(烽上王) 5년, 연나라 모용간(慕容谏)이 2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선봉장 모용간은 상망을 적게 낼 료량으로 서천왕릉을 파헤치려고 했다.

고구려 풍속은 조상무덤이 파헤쳐지는것을 가장 무능하고 불효하고 수치스러운 일로 치부하였다. 그래도 투항을 하지 않자 그들은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덤의 돌을 헤치기 시작해서 얼마 안되여 2천의 군사가 졸지에 몰살했다. 그들은 다시 2천의 군사를 내몰았다. 모두들 겁을 먹고 망설였다. 그러나 목을 친다는 군법이 있는지라 다시 접어들었다. 적진에 약 5백명 군사가 살아남았을 때 묘실에서 풍악소리가 들려나왔다. 퉁소, 가야금, 장고 등의 합주곡이였다. 봉상왕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휘몰아 격전을 벌렸느데 연나라 군사는 대패해서 도망갔다.

427년, 고구려의 도읍이 평양으로 옮겨가고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천여년동안 버림을 받아왔던 고구려의 유적들은 세월속에 잊혀지고 도굴을 당해 여지없이 파괴되였다.

《한씨대원》이라는 전설아닌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있다. 광복전에 통화시 기차역 부근에는 한씨(韩氏) 성을 가진 가난한 농군이 살고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원래 툭 털면 먼지밖에 안나는 가난뱅이 알거지였는데 우연히 횡재를 해서 광복이 날 때에는 밭이 백헥타르, 집 백칸, 성축이 무리를 이루고 머슴만 20여명을 두었었다. 어느 하루 버들광주리를 등에 실은 한 당나귀가 집뜨락에 들어와 풀을 뜯어 먹고있었다. 풀로 덮은 광주리를 헤치니 그속에는 금으로 만든 등촉이며 초대며 사발이며 은잔, 수절, 동거울, 진주,보석들이 그득했다. 그들은 임자를 기다리며 정히 보관을 했는데 종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그것을 팔아 일약 부자가 되였던것이다. 원래 이것은 고구려 묘지에서 파낸 문물들이였던것이다. 산동 유산현(山东乳山县)에서 살길을 찾아 집안에 와 화전을 일구던 전(田)씨네가 옛 묘지가 있는것을 보고 커다란 귀족의 묘를 파고 문물을 도굴했던것이다. 그들은 재물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거리에 나가 두마리 당나귀를 구입했다. 그런데 집안거리의 건달 왕개가 내막을 알고 그들의 뒤를 쫓아 통화 왕바령에 이르러 강탈을 하려다가 싸움이 붙었다. 그들이 싸우는 사이 당나귀 한마리가 도망을 가고 건달은 전씨 형제에게 목숨을 잃었다. 전씨 형제는 한마리만 찾아 몰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달아난 당나귀는 한씨에 울안에 찾아들어 그들의 소유가 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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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대혁명 ⓒ 봉황망(凤凰网)
문화대혁명시기 문물에 대한 관리가 엉망이여서 1986년《장백산》(격월간 조선문 문학지)에서 주최한 전국조선족문학인회의에 참가했을 때만 해도 고구려 성터를 허물어 집 토성을 쌓았고 지어 돼지우리, 김치움마저도 옛 궁전 돌로 만들어진것을 쉽게 찾아볼수 있었다. 지금은 국내성 벽주위에 아파트가 즐비하게 서서 그런 모습은 사라져 없어졌으나 궁전 성벽주위 량옆이 채소 장거리로 변해버렸다.

가령 고구려가 그대로 있다고 가정한다면, 궁전주위에서 사민들이 장사를 한다면 무서운 죄로 다스려질것이 아닌가.

현재 우리가 집안 환도산성 자리를 찾아가면 작은 패말이 서있을뿐 옛날 궁전이 자리하고있던 곳이나 병영이며 련병장은 모두 콩과 옥수수밭으로 변하여 그제날의 기상을 도저히 찾아볼수 없다. 가끔 눈에 뜨이는 깨진 기와쪼각들에서 옛 건물들이 있었다는것을 겨우 상상할 정도이다.

번마다 환도산성에 이를 때면 나는 깨진 기와장을 주어든다. 그것은 깨진 한쪼각 거울이였다. 그 거울속에는 고구려의 넓은 하늘이 담겨있고 피비린 전쟁과 용감무쌍한 장수들의 모습이 비껴있다. 다시 력사의 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 문명사회에서 찌든 나의 령혼이 풍기는 고린내를 느낀다.

기와도 깨지고 야심도 깨지고 옛 고구려도 깨졌다. 하지만 넋이야 어찌 깨지랴.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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