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6장 통혼(1)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7-03 11:15:59 | 최종수정 2018-07-03 11:31:02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본문 첨부 이미지
지금도 두만강류역 조선족들은 다른 민족 사위나 며느리를 삼았거나 남편이나 안해를 얻었다고 하면 주위의 말밥에 오르기가 일쑤이다. 시부모나 가시부모들은 자식의 일생대사를 갖추려 하고 당사자들은 동료들이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행사에 될수록이면 같이 가기를 피한다.

하지만 압록강류역은 예상사로 되고있다. 로인들은 어쩔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젊은이들은 국경이 없는 사랑인데 민족을 가릴 필요가 뭐냐? 떳떳한 태도이다.

집안시 양수조선족향(凉水乡)에서는 1991년부터 1994년사이 조선족 남자가 한족 녀자와 결혼한것이 12명이고 조선족 녀자가 한족 남자한테 시집을 간 사람은 여섯이다. 이 향의 통천촌(通天村)의 방(方)씨일가 4남매중 사위 셋중 둘이 한족이고 며느리도 한족이다. 말하자면 가정성원 민족비례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셈이다.

장백진에서 자그마한 음식점을 경영하는 한 녀주인은 자랑스레 말한다.

《저의 시집은 민족대단결 혼합체예요. 시어머니는 한족, 남편은 몽골족, 저는 조선족, 시누이 남편중 하나는 만족, 다른 하나는 회족이지요. 다섯개 민족이 한가문에서 화목하게 살아가고있어요.》

여러 소수민족이 한족들속에 끼여 살아가는 잡거지구(杂居地区)에서 단일민족으로 순수성을 고집해온 조선족의 통혼이 류행처럼 되기까지에는 가시덤불을 헤치는 곡절많은 투쟁과정을 경과했다.

료녕성 단동시에 사는 김천순(金千顺 74세 경기도 인천 태생)할머니는 목메여 말했다.

《… 맏아들이 한족 처녀와 눈이 맞아 돌아갔어요. 아무리 타일러도 기어이 그 녀자와 살겠다는거요. 고지식한 령감이 밸김에 매를 댔어요. 그러자 어느날 아들이 말도 없이 훌쩍 강을 건너 조선으로 갔지 뭡니까. 아들이 탈가한 다음부터 나는 이제까지 제 정신으로 사는게 아니라우. 후회가 되고 그럴 때마다 령감이 원망스러웠어요. 그게 1960년 말이였으니까 꼭 35년전 일이라우.
조선에 가서 집으로 편지가 왔어유. 처녀는 기어코 우리 집 며느리가 된다고 퇴근하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 어머니 하면서 꼴사나와하는 눈치인데도 그냥 살갑게 돌더라니깐요. 처녀의 집에서도 사돈을 맺자고 했어유. 내가 화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자 처녀는 밤낮으로 간호를 했어유. 친딸이면 그렇게 하겠소. 그랬어도 령감의 눈이 무서워서 감히 아들의 주소를 대주지 못했군요. 만 3년을 기다리다가 처녀는 마음에 없는 시집을 갔지라우. 령감의 환갑에 아들이 왔었답니다.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고 살지요. 그런데 반백이 넘은 그 녀자가 알고서 찾아와서 리혼을 하고서 내 아들과 살겠다는거요. 이번에도 동의하지 않으면 압록강에 빠져 죽겠다는거우다. 그 녀자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갖고있다우. 사람은 사람 가는 길을 가야 한다고 요행 달랬습니다. 사랑이란게 그렇게 무서운 줄을 이젠 알겠수다.》

본문 첨부 이미지
대개 이주민 1, 2세에 있어서 통혼은 금지구역이였다. 그들한테는 사랑이란 일종 사치품으로 되여있었다.
하지만 제3세대에 이르러 결혼은 민족을 초월한 사랑을 우선으로 했으므로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70년대 말 장백현 12도구 발전소를 건설할 때 조선족 신(申)씨 처녀와 한족 호(胡)씨 총각은 열광적인 사랑에 빠졌다. 처녀의 집에서는 딸을 달래다못해 때려서 집에서 쫓아내기에 이르렀다. 처음에 한족 집에서는 아들의 청을 받아들였는데 사돈이 될 측에서 강경히 나오자 오기로 반대했다. 이미 육체관계까지 가진 처녀, 총각한테는 퇴로가 없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정조가 목숨보다 귀중했던것이다. 그보다도 그들 일남일녀는 진정한 사랑의 포로였던만큼 어느날 둘은 발전소 턴널속에서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그들의 자살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감히 억압수단으로 자식의 혼인을 간섭하기를 저어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의 생명으로 금지구역을 깨뜨리고 통혼의 길을 트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장백현의 전장림(田长林 한족 40세)은 미남이고 체육에 능해 총각시절에는 처녀들의 우상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시에서 농촌으로 하향했던 조선족 전(全)씨 처녀는 당시 부모들의 주관으로 한 조선족 총각과 약혼을 했었다. 그런데 그후 처녀는 전씨 총각을 사귀면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드디여 알게 되였다. 부부오누이라고 그들 둘은 미남미녀로 천생배필이였다. 하지만 두가문에서는 견결히 반기를 들었다. 처녀의 부모들은 파혼이란 있을수 없는것이라고 부랴부랴 결혼식을 가졌다. 처녀는 결혼 사흘만에 리혼을 선포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전씨와의 결혼을 제기했다. 분노한 부모들은 딸자식 버린셈 친다고 집에서 쫓아냈다. 총각의 부모들도 아들이 타민족의 처녀인데다 더구나 리혼까지 한 녀자라 도저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둘은 탈가해서 유격전(游击战)을 했다. 동거 열달만에 그녀는 주인없이 버려진 집에서 해산을 했다. 아이까지 있게 되자 시집에서는 하는수 없이 며느리를 집으로 데려왔고 그후 세월의 흐름속에 친정에서도 사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고진감래의 뜻을 담아 딸의 이름을 달 첨(甜), 외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선인들의 피어린 투쟁으로 오늘 통혼의 탄탄대로가 열렸다.
장백현문화관 사진사 정덕리(郑德利 1960년 장백현 태생)는 말한다.

《저의 안해는 현 당학교 자료실에 근무하고있습니다. 나보다 두살 년하입니다. 1982년 11월,전 현 공청단간부회의가 있었거든요. 그때 저는 인쇄공장 공청단 대표였는데 사이다공장 간부대표로 회의에 온 홍영애(洪荣爱 1962년 장백현 태생)를 보자 홀딱 반해버렸군요. 첫눈에 정이 든거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에 영애씨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한 처녀는 없는것 같았습니다. 보름동안 회의기간에 면목을 익힌 다음 슬슬 접촉하면서〈진공〉을 했더니만 어렵지 않게 영애의 사랑의 방선이 허물어지더군요. 우리 집에서는 며느리감을 보더니만 대번에 두손 들어 환영, 그런데 장인 될 분이 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겁니다요. 큰 마음을 먹고 술이랑 가득 사들고 찾아갔습니다. 꾸벅 인사를 올리는데 장인, 장모가 외면을 해버리는겁니다. 나는 인차 부엌에 나가 사 들고 간 고기와 남새로 료리를 해서 상에 차려 놓고 술잔을 올렸습니다. 두세번 사양을 하더니만 장인어른이 술은 받아 마시면서도 좋다 궂다 대답이 없더군요. 같은 민족이라 해도 딸 가진 부모면 다 그럴텐데 조선말도 모르는 한족이니 왜 섭섭한 생각이 없겠습니까. 리해가 가더군요. 그 다음부터 미워하든 말든 시간만 나면 찾아갔지요. 처남과 처제가 나하고 인차 친해졌고 딸의 고집에 장모가 마음이 돌아섰어요. 장인이 고립상태에 빠진거지요. 반년이 지나자 장인도 끝내 투항을 하데요. 우리는 1986년 8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남편의 말에 홍영애씨는 얼굴에 홍조를 떠올렸다.

《부모들은 처음에 저 동무와 거래한다는 눈치를 알고 반대했어요.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교원이라서 강박은 하지 않았다구요. 애 아버지가 많은 헐수를 본거지요.
결혼식날 부모님들은 락루를 했습니다. 한족한테 딸을 준다는 섭섭한 마음도 남아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잔치날 우리 집에서는 조선식대로 사위에게 상을 받겼는데 저는 큰상을 받지 못했거든요. 한족들은 상법이 없답니다. 식당에서 손님접대로 결혼식이 끝났지 뭡니까.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큰상을 받지 못한 저도 서운하더라구요. 저녁에는 문화관 대청에서 과일과 해바라기를 까며 차물을 마시며 좌담과 오락을 하다가 신방으로 갔지요.》

이들 젊은 부부는 자그마한 세방을 얻어 기거하면서도 불만이 없이 깨알이 쏟아지는 살림을 하고있었다. 남편은 한족 남편들이 그러하듯 퇴근하면 밥도 하고 료리도 볶고 빨래같은것도 담당한단다.

그러다가도 조선족 손님이 오면 아닌 보살 하고 온돌에 앉아 안해가 음식상을 챙기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자기가 나서면 안해의 흉이 될가 그런단다. 조선족 안해와 살면서 음식습관도 많이 변해 김치에 맛들였고 조선말도 알아듣고 웬간한 말은 곧잘 한다. 그들은 소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홉살짜리 딸애를 키우고있다.

아버지의 민족을 따른다는 중국법에 의해 딸애는 호구부에 한족으로 등기되였지만 학교는 조선족학교를 다녀서 중국말과 조선말을 마음대로 구사하고있었다. 귀여운 녀자애의 이름은 정홍(鄭洪), 부모의 성을 하나씩 따서 나란히 붙였단다. 정홍이라는 이름은 거의 동시기에 중국 산동성에서와 조선 함경북도 남양에서 장백으로 이주하여 압록강류역에 뿌리를 박은 서로 다른 두민족 통합의 결정체였다. 통혼현상은 두나라 방방곡곡에서 모여와 동거동락해온 여러 민족의 통합추세를 보여주고있었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 봉황망코리아미디어 &chinafocu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혈연의 강들 
봉황망 중한교류채널 바로가기 베이징 국제디자인위크 기사 바로가기
차이나포커스 Q&A 배너
기사제보 배너
윤리강령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