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4장 향도(2)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6-26 09:31:04 | 최종수정 2018-06-26 09: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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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턱 남향 양지바른 소나무숲속에는 이미 묘자리를 파놓았었다. 상여에서 관을 내려서 다시 흰 무명 띠로 관을 받들어 광중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관우를 깨끗이 쓴 다음 구의(柩衣)와 명정을 정돈해서 정히 덮었다. 다음 고인의 유품들을 관과 회벽(灰壁)사이 공간에 꿍꿍 박아넣었다. 원래 유품은 태우기로 되여 있는데 호림방화(护林防火)시기라서 파묻는것이였다. 상주가 옷자락에 흙을 담아 취토를 마치자 힘 좋은 젊은 상객들이 모여들어 파묻기 시작했다. 담배 둬대 피울 사이에 성분이 되였다.

나는 늘 장례식에 참가하지만 토장은 오랜만이였다. 화장법 실시이후 연변은 깊은 산골에서마저 토장은 금지되였다. 몰래 토장을 했다는것이 들통이 나면 벌금형을 받고도 화장을 한 다음 골회를 화장터에 모셔야 한다. 매번 장례식을 맞아 화장터로 가면 골회가 나와 추도식까지 하고나면 보통 점심을 오후에 치르기가 일쑤이다. 빈장관리직장에서 꾸리는 식당에서 빈객들을 접대하겠다는 약속이 있으면 화장을 우선해주어 시간을 당길수가 있다. 그대신 추도식(追悼式)을 기다리는 뒤 사람을 생각해서 간단히 쫓기듯 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시간상 관계로 xxx형식은 생략하고…》《사촌부터는 집체로 술을 붓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주관자가 이야기할 때는 죽은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불쑥불쑬 든다. 그래도 연길같은 곳은 오후쯤이면 한가하다고들 한다.

장춘과 같은 대 도시에서는 면목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시체가 화장터에서 이삼일을 기다린다고 한다. 언제 될지 몰라서 상객들은 화장터에서 날을 새우게 되니 그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그런만큼 화장터 일군들의 코대가 높아가기도 한단다. 몇해전 장춘 어느 집에서 아이들 친구들을 불러다 자게 하고 타지로 어른들이 갔다가 오니 가스중독으로 세 아이가 죽었더라나. 그래서 이튿날 화장터로 갔다. 그중 한사람이 세도가 있는지라 연줄을 통해 자기 아이를 먼저 화장하고 골회함에 넣었는데 바로 그때 함께 죽었던 아이들이 살아났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있다. 매번 적어도 천사람이 죽어야 화장터가 수지평형을 이룬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장백같은데서는 백명도 어려우니 화장이 어려운것이 아닐수 없다. 87년도에 조선족 27명, 올해 그때까지 26명이라니 기타 민족 합계가 많다고 해도 전 현적으로 통계를 낸대도 천명은 불가능할것이다.

요즘 급격히 도시가 개발되고 확장되면서 연길같은 도시 주변의 옛 무덤들도《뚱챈(动迁 이장)》을 당한다. 하지만 다시 묻힐 땅을 법적으로 주지 않는다. 그래서《뚱챈》을 당한《불행한》가문의《원로》들과 장손 등《지도자》층에서는 고인들을 지하로부터 화장터의 현대 고층빌딩으로 모시느냐, 아니면 수로를 열어 고인 모두가 증조부님을 따라 그이의 고향으로 가시게 하느냐를 열심히들 결책하기에 골머리들을 앓고있는 실정이다.

작가 리혜선(李惠善)녀사는 수필에서 이렇게 썼다.

- 묘하게도 올해 청명은 오후에 들었으므로 나는 딸애도 산소에 데리고 갔다. 나는 딸애에게 산소란 어떤 곳이고 이런 곳에는 어떤 이들이 있는지 설명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선조들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선조들의 이야기란 옮김말로 하면 력사를 말한다. 이제부터는 선산이 없어 선조들의 력사도 차차 희미해질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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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성옹 장례행렬
전국적으로 회족(回族)을 제외한 모든 민족은 화장법을 따라야 한다는 엄연한 법 조목이 명문화되여있는 나라안에서 토장이 계속되고있는 장백이 못믿으리만치 기이하고 부러웠다.
우리 민족의 무덤문화가 여기에서는 여전히 살아서 숨쉬는것이 아닌가. 그리고 고인들도《입토위안(入土为安)》을 할것이 아닌가.
전독감이 상주들과 함께 제물을 진설하는 사이에 계장이 작은 접시에 삶은 계란 세알을 담아 들고 묘지뒤로 왔다.
땅에 신문지를 펴놓고 술을 붓고는 꿇어 앉아《산신령님께 아뢰오니 오늘 김한성아바이를 여기에 모시니 앞으로 잘 돌보아줍소》라고 한마디 하고 저가락으로 계란 하나를 꿰여서 풀밭에 던진다.

뒤미처 안신제가 시작되였다. 독감이 먼저 첫 술잔에 술을 붓고 절을 하고는 꿇어 앉아《김한성아바이, 여기에 모셨으니 자손들의 제술을 받으시고 고이 잠듭소》라고 한마디 하고 허리를 폈다. 그다음 아들, 딸 내외분, 손자, 손녀들이 술을 붓고 절을 했다.

고인은 아홉살에 부모를 따라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이사와 27살에 성가해서 아들 아홉에 딸 넷을 낳았다. 그런데 소작농으로 생활난에 쪼들려 겨우 아들 하나, 딸 둘을 키워냈을뿐이였다. 지금 아들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고 큰 딸은 아들 형제, 막내딸은 딸 하나를 두었다. 결혼해서 60년후에 무덤에 묻히기까지 김한성로인은 출가지외인인 딸은 제외하더라도 아들, 며느리에 친손군 셋을 둔것이다.

제사가 끝나자 독감은《김한성아바이, 이곳에 모셨기로 자손들의 모든 근심과 병과 액을 다 맡으시여 후손이 번창하고 가문이 빛나게 해줍소》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리고는 상주들과 상객들을 보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산을 내리라고 명했다.

왜서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가?
나의 물음에 독감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지막 길을 간 사람인데 자꾸 돌아보면 비감만 더할것이니 하는 얘기라오.》

나는 고인의 무덤옆에 서서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과 강건너 혜산시를 묵묵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덤 오른편에는 자그마하게 쌓아놓은 흙무덤 하나가 있었다. 이제 고인과 한생을 같이해온 로친이 묻힐 묘자리라고 한다. 세월의 흐름속에 안로인이 묻히고 그 다음 자식들이 묻힐것이다.

력사는 무덤으로 촘촘하다. 중국 조선족 백여년 력사에서 우리는 이주민 1세와 2세를 산소로 모시고있다. 그 묘지가 렬사릉원에 자리했든 산비탈 풀밭속에 있든 묘지속에는 후손을 위해 몸부림쳐왔던 분들이 잠들어있다. 그 분들이 지니셨던 지혜와 민족의 보귀한 유산들이 묘지밖의 오늘 우리의 사회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할 때 찌드러가는 민족사회의 미래에 대한 무리꾸럭 근심이 가슴속에 봉분으로 솟는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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