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4장 향도(1)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6-21 11:46:24 | 최종수정 2018-06-21 1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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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9일은 장백현성 조선족사회의 슬픔의 하루였다. 장백진 성동위 10호 아파트 312호에 거주하는 김한성(金汉声 86세 함경남도 단천군 복기면 태생)로인이 일생동안 함께 살아온 가족, 친척, 친지들과 영원한 작별을 나누는 날이였던것이다.

장백현 취재를 마치고 압록강을 따라 림강으로 떠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나는 장례에 참가하려고 아침 아홉시에 상가(丧家)로 찾아갔다. 벌써 고인의 친척과 친지들 수백명이 아파트주위에 끼리끼리 모여있었다. 어림 짐작으로도 7백여명은 될것 같았다. 장백진 조선족 호수가 900여호, 4천여명이라고 하니 거의 집집마다 대표가 다 온거나 다름 없었다.

장례식은 장백진《향도(香徒)》에서 주관했다. 장백현 향도는 30년대에 세워져서 지금까지 줄곧 맥을 이어가고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효도를 인륜의 으뜸으로 삼아온 우리 민족은 이주초기부터 향도를 만들었댔으나 모든것을 때려 부수는 문화대혁명시기에 해체되고 상두막까지 불을 맞는 봉변을 당해 여느 곳에서는 자취를 감추어버린 조직이였다. 그런데 장백현에서는 여직 그것이 맥을 잃지 않고 남아있다니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장백현성 소재지인 장백진과 장백진 록강촌(鹿岗村)에 향도조직이 있다고 한다. 향도에는《호상계장정(护丧契章程)》까지 있다. 총 책임자는 계장(契章)이라 하고 그 아래에 독감(督监)과 유사(有司), 소임(小任)이 있다. 계장은 2년에 한번씩 바꾸고 그 아래는 1년을 기한으로 한다. 장백진 향도는 구역별로 동, 서, 중부로 나뉘고 각각 선거로 당선된 독감이 책임지고있다. 계장은 구역별로 륜번으로 한번씩 나온다.

1987년 동부 독감였던 리권수선생은 말했다.

《향도도딕(조직)은 누구나 신텅(청)하면 탐(참)가할수 있디요. 도딕성원이 된 계원(契員)은 입회비 10원을 바텨(쳐)야 한다 이거요. 그 다음은 실정에 따라 돈을 좀씩 거두디요. 향도에 참가한 날부터 한달이 디나야 대우를 향수하기로 되여있디요. 상을 당한 계원은 장례비 500원을 내야 하디요. 지금 현성 조선족들은 거의 모두가 탐가했을뿐 아니라 한족들도 더러 탐가했디요. 덩(정)부에서도 무척 향도에 왼심을 쓴답니다. 87년도에 현 민정국에서 돈을 내서 상두를 새로 만들어 두(주)었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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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진의 최근 모습 ⓒ 봉황망(凤凰网)
현재 장백진 향도의 계장은 김광락(金光洛)이고 그날 장례를 도맡은 사람은 동부 독감 전장근(全长根)이였다.

고인이 생전에 기거했던 칸에 관이 모셔있었다. 붉은색 비단에 먹으로《김공지구(金公之柩)》라고 쓴 명정(铭旌)은 병풍과 나란히 왼켠에 세워있고 여러 가지 제물을 챙겨놓은 둥글상우에는 검은 천으로 테를 두른 유상이 모셔져있었다. 독감이 술을 붓고 세번 절을 하고 나서 허리를 펴고 손을 맞잡고 서서 유상을 유심히 바라보며《김한성아바이, 오늘 집을 떠나 좋은 곳으로 모시오니 자손들이 챙긴 제상을 잘 받고 길을 떠나겝소.》라고 한마디 한다. 마치 산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듯 인정스러웠다. 구태여 옛 사람들이 고집해온 고사를 현대말로 풀어서 하니 한결 정답고 자연스러운 감을 주었다.

그다음 상주들이 순서 차례로 술을 붓고 절을 하고 고인의《식사》까지 끝내자 독감이 또《아바이, 슬슬 떠나보겝소》라는 말로 축문을 대신해서 한마디 하자 상여군들이 우르르 모여들어갔다. 곡소리가 진동했다. 상주로 된 고인의 큰 아들 김휘(金辉 원명 金宗建 53세 장백현 17도구 간구자 태생)가 유상을 안고 먼저 창문으로 뛰여내리고 그다음 명정을 쥔 사람이 따르고 마지막으로 상여군들이 관을 조심히 받들어 창문을 넘어섰다. 아파트라 문이 많은 연고로 고인은 두번이상 문턱을 넘지 않는다는 법도를 지켜 창문을 넘은것이였다. 일층이니 다행이지 2층만 되였더라도 천구(迁柩)가 심히 어려웠을것이다.

령구를 철근과 철관으로 만든 팔인(八人)상여에 싣자 잔뜩 허리가 곱은 안로인(崔连顺 75세 함경남도 호안면 태생)이 관을 쓸면서《령감, 이제 가면 다시 못 오는 무덤입꾸마. 먼저 갑소. 내가 뒤따라 가리다.》라고 해서 주위의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발인제가 삭제되고 상여군들이 상여를 자동차에 실었다. 상복은 없고 굴관과 수질도 없이 베로 만든 건만 쓴 상주들이 곡을 하며 자동차에 올라탔다. 계장과 독감을 태운 차가 뿡뿡 기적을 울리며 움직이자 그 뒤로 령구차와 상객을 태운 자동차, 뻐스 등 무려 23대의 차량들이 발동을 걸고 따랐다. 폭죽소리가 진동했다. 폭죽을 터치는 중국식 장례법이 요령잡이와 상여군들이 선창, 후창으로 하던 만가를 대신한것이라 하겠다.

나는 독감들과 함께 차를 탔다. 차에 앉은 사람들은 너나없이 왼쪽 앞가슴에 흰 바탕에 붉은 글로《장백진 호상위원회 총독감(혹은 독감)》이라고 쓴 표식을 삔으로 달고있었다. 전독감은 고인이 운명을 한 날(6월 7일)부터 호상을 맡아보다나니 피곤이 몰려 눈언저리가 벌겋게 상기되였다.

《젊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장례절차를 전연 모른다이. 그래서 향도에서 나서서 토종 범절을 맡아보는거우. 운명직전에 보고가 들어오면 속광(属矿)이며 수시(收屍)며 입관 등 세세한 부분까지 지도를 한다오. 보통 삼일제까지 책임을 지게 돼 있소.

지금은 흔히 병원에서 운명을 하므로 시신은 태평실(太平室)에 모시고 집에서 유상을 걸어놓고 모든 행사를 하는데 김한성로인의 경우는 집에서 사망했으므로 전통 범절을 그대로 갖추게 되여 다행이였소.

김로인의 로친이 여간 꼼꼼한 분이 아니더구만. 령감과 자기가 입고 갈 수의와 상주들의 건을 손으로 지었다는거우. 삼을 물새김해서 껍질을 손으로 벗기고 무릎에 비비며 오리오리 실을 뽑아 베틀로 짠거라지 않겠소. 하기야 한생을 농사와 베짜기로 살아온 로친네니깐 그럴테지만 하여간 보통이 아니라구.》

압록강변을 따라 한참 달리던 차가 장백진 서산 비탈에 멎어서자 사람들은 차에서 내렸다. 상주가 유상을 가슴에 안고 앞서고 그 뒤로 명정, 꽃다발, 상여 순으로 비탈길에 올랐다. 3백여명의 상객들이 맨 뒤에서 줄레줄레 묻어갔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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