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3장 수박춤(2)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6-19 09:58:21 | 최종수정 2018-06-19 10: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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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나면 보통 새벽 한두시가 된다. 그 다음은 밤참이 시작된다. 마을 아낙네들이 준비한 안주에 탁주, 청주를 마시면서 또다시 오락판이 벌어진다. 보통 자리를 파할 즈음이면 새벽닭이 홰를 친다. 이튿날 그 마을을 떠날 때면 온 마을이 떨쳐나서서 멀리까지 배웅을 하면서 애수의 정을 나눈다. 어떤 사람들은 악기 짐들을 지고 문공단을 따라 며칠씩 부근 마을로 따라 다니며 공연을 보고 또 본다.

《일년에 반년시간은 밖에서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버는것도 아니였습니다. 도시 극장에서 공연해서 번 돈으로 순회공연을 했지요. 누구 하나 불만이 없었답니다.

지금 사람들이 돈에 산다면 그때까지만도 사람들은 정에 살았다고 봐야 할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동구에서 마을까지 줄레줄레 서서 농악무를 추며 영접할 때나 환송할 때면 친혈육같은 석별의 정에 눈물이 날지경이였답니다. 지금도 외지로 가면 길에서 사람들이 김단장 아닌가고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나는 전연 기억이 안나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공연을 생생히 기억하고있는것입니다. 그런 시대는 영영 지나간것 같아요.

지금도 문공단이 있긴 하지만 80년대 후반기부터는 명절이나 조선에서 대표단이 올 때면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지구(地区)나 성, 전국 조선족, 혹은 소수 민족문예콩클에 참가하는것뿐이랍니다.》

장백현문공단에서 전국 성 및 전국 콩클에서 많은 상을 탔지만 소문을 놓은 절목은《수박춤》이였다. 김씨형제가 1990년 단동에서 가진 전국소수민족문예콩클에서 특별상을 탔던것이다. 김학현선생은 그때의 정경을 감회에 젖어 되새겼다.

《그때 우리 현에서는〈수박춤〉을 전통절목으로 무대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형님의 보조역에 불과했답니다. 콩클이 며칠동안 진행되자 심사원이나 참가자들은 지루하고 따분해서 무대우에서는 열심히 표현을 했는데도 밑에서는 잡담을 하거나 끄덕끄덕 졸고들 있었다구요. 우리의 절목은 마지막으로 세번째에 배치되였는데 형님과 함께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자 장내가 무시로 박수소리속에 떠나갈듯 했지 뭡니까. 그번 콩클에서 우리의〈수박춤〉이 제일 인기절목이였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특별상을 탄거지요.》

김학천옹과 김학현 형제는 팬티우에 울로초로 결은 원시적《미니스커트》를 두르고 벌거벗은 몸으로 무대에 올랐다.《수박춤》은 반주도 없고 지정곡도 없다. 다만 형이 손으로 벌거숭이 사지를 치면서 입으로 가지가지 바람소리, 우뢰소리, 비소리, 짐승소리, 새소리를 내면 동생이 함지박에 담긴 물에 엎어놓은 달바가지를 두드리며 형님의 손박자를 맞추었다. 흥이 날 때면 얼굴을 여러가지 형태로 일그러뜨리면서 형제간에 상호 대방의 몸을 손으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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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춤은 원시사회 부락민들이 추던 춤입니다. 사냥물을 앞에 놓고 벌거벗은 부락민들이 몸체며 얼굴이며 사지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좋아서들 뛰던 모습 그대로이지요.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내려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되여 우리 가문의 가보로 되였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다행이 셋째 형님께서 부친한테서 전해받았는데 이제 형님 대에서 종말을 볼것 같아요. 조카들이나 나의 자식들은 전혀 거기에 흥취가 없답니다. 손바닥으로 박자를 치는것은 어렵지 않게 배울수 있지만 입으로 수십가지 소리를 내는것은 타고 난 목청과 피나는 공력을 들이지 않고는 안되는 일이거든요.》

1995년 7월 24일, 나는 김학현선생과 함께 민간예인 김학천옹을 뵈러 14도구로 갔다. 그분의 집은 14도구진 소재지에 있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늙은 량주는 몇해전부터 8리 상거한 골짜기에 들어가 과수농사를 한다고 한다. 절반 못미쳐서 길이 험해서 우리는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협착한 골짜기로 난 오솔길로 한참 가니 맑디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옆 록음속에 포수막을 방불케 하는 작은 귀틀집이 바라보였다. 귀틀집 터전에는 딸기며 담배며 옥수수며 도마도, 배추, 부추, 머루, 파, 열콩 등을 심었고 갖 옮겨 심은 사과나무 묘목들이 몸살을 하느라 간신히 이파리들을 피워내고있었다.

김학천옹이 마침 귀틀집에서 나오다 우리를 보고 반겼다. 로인은 나이에 비해 너무나 겉늙었었다. 허리가 잔뜩 굽어 1.67m의 키가 20센치는 줄어보였다. 얼굴은 소나무 껍질같이 주름투성이고 런닝그바람에 내놓인 살결은 검다 못해 흑인을 방불케 했고 목이며 팔은 뼈가 앙상했다.

심심산골에 외홀로 와서 전기도 없는 귀틀집에서 살면서 밭을 붙이고 과수농사를 하건만 해마다 장마와 가물이 겨끔내기로 찾아와 본전을 찾으면 다행이라고 한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근육위축병에 걸려 손발이 쪼그라들고 팔다리 살이 빠지며 좀만 일해도 몸이 붓긴다고 한다. 약보다 악으로 병을 이기며 여생을 고생속에 살아가는 김학천옹은 인적 없는 산속에서도 귀틀집 벽에 걸어둔 울로초옷을 바라보며 지나온 삶에서 생의 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형제분은 웃도리를 벗어내치고 허리에 울로초옷을 질끈 동여매고 수박춤을 추었다. 손바닥으로 앙상한 몸을 치면서 귀방울을 흔들며 앙천대소하기도 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인간의 온갖 희로애락을 표연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속에 어쩔수 없이 늙어가는 자연의 섭리에 그치는것이 아니였다. 가난속에 이지러가는 보귀한 문화재의 찌든 모습이였다.

사진기에 눈을 붙이고 렌즈속에 축소된 김학천옹의 탄력 잃고 축 처진 얼굴이며 배 살가죽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나는 죽음이라는 끔찍한 생각에 몸을 떨었다.

《세상에 나지 말것이니 그 죽는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것이니 세상에 사는것이 괴로우니라.》

윙~ 원효대사의 말 한마디가 귀가에서 울리였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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