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3장 수박춤(1)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6-14 14:06:51 | 최종수정 2018-06-14 17:49:08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본문 첨부 이미지
6월 5일, 오후 나는 장백현문화관을 찾아갔다. 문화관은 전 현 7만 6천여명 인구중에 1만 3천명의 인구를 가진 조선족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현 정부청사하고 2백여m 동안을 둔 문화관은 ㄱ자형의 3층건물이였다. 남향쪽은 현 도서관이고 동향쪽은 문화관이였다. 문화관장 리성태(李圣太)선생은 조선족문단에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1979년부터 필을 들어서부터 중편소설《도도히 흐르는 압록강》등 소설, 실화, 전설 등 60여편을 발표하였고 조선문판 잡지《장백》을 꾸려 장백현내에서 문학인을 배양했고 많은 문화유산을 발굴했다.

문학창작에 종사하면서 내가 몸 담고있는 연변인민출판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있는 리관장은 나를 만나자 마치도 오랜 지기를 만난것마냥 반가와 했다.

《장백현문화관은 1949년 10월에 건립된 이래 성인교육, 문예보도(辅导), 도서열람, 미술전람, 체육과 문화오락활동, 방송 등 사업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1950년부터 1953년사이에만도 150여명 교원을 배양했는데 그중 조선족 교원이 90여명이였답니다. 그리고 식자반(识字班)을 꾸려 천여명 조선족 농민들을 문맹에서 해탈시켰답니다. 현재 전 현 92개 촌에 문화실(文化室)이 있는데 조선족들의 문화실은〈농민의 집〉으로 되고있습니다. 농민들은 문화실에서 각종 문화오락활동을 하고있지요. 어떤 문화실에서는 반달에 한번씩 로인무도회를 열고 한달에 한번씩 문예공연, 이야기회의, 기류(棋类)시합 등 활동을 전개한답니다. 그리고 문화실마다 농민악대가 있는데 태양촌(太阳村) 농민악대는 1989년에 장백현을 대표하여 혼강시(浑江市 장백현은 혼강시 관할에 속함) 제2차 농민문예공연에서 1등을 했습니다. 태양촌 농민악대의 배우와 악대 대원은 모두 35명인데 그중 조선족이 70%를 점합니다. 우리 문화관은 1992년부터 련속 3년간 성 2등 문화관으로 되였고 지난해에는 성내 우수 문화관으로 되였답니다.》

장백현문화관에는 20명 직원이 있는데 그중 조선족이 6명이다. 문화관에서 꾸리는《장백문화보》는 한족말이 위주이고 조선문은 아주 드물다고 한다. 조선문판《장백》잡지도 5기로 마감지었다고 한다. 그 원인은 경제난에 있었다. 국가에서 매년 지불하는 사업경비가 16만원, 직원로임을 떼내고 나면 전화비도 난이란다. 그래서 541㎡의 3층 문화관청사의 1, 2층을 세를 주고 자그마한 식품공장을 경영하여 그 수입으로 간신히 문화활동을 하고있는 사정이였다.

《문화사업이란 돈을 퍼붓는 일이거든요. 9월 15일, 장백조선족자치현 건립일이면 조선족예술절인데 해마다 이 날의 활동에 문화관수입은 거덜이 날지경이랍니다. 경비난에 쪼들리다보니 문화유산발굴사업과 문화재에 대한 관리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있습니다. 14도구에 계시는 김학천(金学天 64세 14도구 干沟子 태생)로인은 민간예인으로 전국에 알려진 분이신데 병환에 계신줄 알면서도 도와주지 못한답니다. 1990년 김학천로인은 우리 문화관의 전임 관장이신 김학현(金学铉 60세 14도구 간구자 태생)선생과 함께 료녕성 단동시에서 열린 전국 소수민족문예콩클에서〈수박춤(手拍舞)〉을 추어 단연 특별상을 탔답니다. 한국같으면 인간문화재로 생활보장이 될텐데…》

김씨일가는 조선 함경북도 단천군에서 살다가 부친(金达淳 1962년 77세로 사망)대에 장백현 14도구 간구자로 이주해왔다. 대대손손《수박춤》을 가보(家宝)로 삼아 전수해온 김씨네 자식들은 음악과 춤에 남다른 재질을 갖고있었다. 김달순은 슬하에 아들 넷, 딸 하나를 두었는데 가보를 고스란히 배운것은 셋째 김학천이였다. 맏아들(1993년 78세로 사망)은 목청이 나빠 부친의 선정을 받지 못했고 둘째는 조선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와 얼마후 사망했다. 딸은 출가지 외인이라 배제되였다. 형제들 중에서 음악재질이나 지식수준이나 막내인 김학현선생이 으뜸이긴 했으나 어려서 집을 나와 공부를 하다가 뒤미처 조선전쟁에 참가, 퇴대후에는 사회공작을 하다보니 가보를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다. 했으나 그는 장백현 가무단 단장으로 30여년간 있으면서 장백현 조선족예술 발전에 일생을 바쳐왔다. 그러다 보니 소학교를 마치고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고 산 셋째 김학천옹이 가보를 고수하게 되였다.

지난해 리직하고 집 가까운 산비탈에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면서 여생을 보내고있는 김학현선생은 자기의 지나온 생애를 감회깊이 돌이켜 보았다.

본문 첨부 이미지
▲ 통화(通化)도시 ⓒ 봉황망
《1959년에 장백현문공단(文工团)이 서서부터 1984년 문화관장으로 조동되기까지 줄곧 가무단의 부단장, 단장으로 있었습니다. 문공단은 조선족, 한족, 만족으로 이루어졌는데 조선족이 중심이였습니다. 우리 문공단은 통화(通化)지구에서 유일한 조선족 문예단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현경내를 벗어나 통화지구에서 활약했답니다. 83년까지 해마다 전 통화지구를 한번씩 순회공연을 했어요. 통화, 류하, 림강, 혼강, 휘남 등 현성이나 시에 가서 공연할 때면 늘 극장이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주변의 농촌에서 조선족들은 찰떡을 해지고 기차 타고 뻐스 타고 와서는 려관이나 친척집에 묵으면서 관람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두세번씩 보고 또 보았지요.》

도시에서 공연을 마치면 문공단은 복장이며 악기들을 등짐으로 질머지고 농촌으로 떠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십리 산길을 도보로 걸어 산골 벽지에 가면 연원보다 관중이 더 적을 때도 있었다. 문공단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족마을에서는 남녀로소 총 동원하여 동구밖까지 나와 영접했다. 마을은 명절기분에 들끓는다. 탈곡장이나 학교운동장에 간이무대를 맨다. 널이 귀한 마을에서는 집집에서 정히 보관해두었던 관널을 내놓았다. 로천공연은 무대가 앞뒤가 없다. 무대를 중심으로 사방에 관중들이 빼곡히 앉는다. 겨울같은 때면 속옷우에 공연복장을 껴입고 추위에 덜덜 떨면서 공연을 했다.

류하현 강가점에 가서 공연할 때 마침 겨울이라 학교 교실에 책상을 붙여놓고 무대를 매고 공연을 했는데 부근 마을에서 소문을 듣고 관중들이 구경을 오다보니 창문턱이며 옆칸에 미여지도록 꽉 찾다. 공연이 시작되자 옆칸에서 사람들이 밀치여서 간벽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촌장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간벽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일손을 도왔다. 어떤 때는 무대 막을 여닫는 일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맡아했다.

한번은 항일전쟁을 제재로 한 단막극을 공연했는데 극은 일본군 토벌대의 복멸로 끝났다. 사전에 일본군 중대장이 죽게 되면 막을 닫으라고 일렀는데도 그만 구경에 혼이 빠진 그 사람은 극이 끝났는데도 멍청하니 서있었다. 급해맞은《죽은》중대장이 어서 막을 닫으라고 손짓을 했다. 한결이나 그래서야 그 사람이 제 정신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막을 닫아야 하는지 갈래판을 잡지 못해 무대라는것도 잊고《죽은》중대장한테로 걸어가서《풍을 닫으람둥?》하고 높은 소리로 물어서 장내가 일장 폭소속에 파묻혔단다. 60년대와 70년대, 어떤 고장은 전기가 없어 무대조명을 가스불로 대체했다.

공연시간은 보통 두시간 반이였다. 매번 공연이 끝나면 관중들은 돌아갈 생각을 않고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는다. 관중과 연원들이 하나로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한바탕 놀기가 일쑤이다. 그것은 조선족마을마다의 습관으로 굳어있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 봉황망코리아미디어 &chinafocu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혈연의 강들 
봉황망 중한교류채널 바로가기 베이징 국제디자인위크 기사 바로가기
차이나포커스 Q&A 배너
경한 배너
기사제보 배너
윤리강령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