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2장 묘지의 고백(1)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6-12 09:48:42 | 최종수정 2018-06-12 09: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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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산우에서 강건너 혜산시를 굽어보노라면 첫눈에 안겨오는것은 항일전쟁승리기념탑이였다.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으로 기여들듯한 거북같이 생긴 거대한 베개봉우에 우뚝 솟은 기념탑은 펄럭이는 기발형국이다. 기발아래 무장을 든 용사들이 돌격하는 모양으로 조각되여있는 탑은 하나의 훌륭한 예술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똑같은 혁명렬사기념탑이면서도 탑산의 혁명렬사릉원앞에 세워진 혁명렬사기념비는 조선족이 사는 마을마다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는 기념비모양이다.

나는 기념비앞에 옷깃을 여미고 숭엄한 심정으로 섰다. 하늘을 찌르고 우뚝 솟은 혁명렬사기념비 뒤 경사진 언덕에는 질서정연하게 묘지들이 있고 묘지마다 렬사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세워있다. 묘지에는 항일전쟁과 중국해방전쟁에서 희생된 여러 민족 렬사들이 고이 잠들어있다. 그속에는 항일 녀용사 리계순(李桂顺 1914-938)의 묘지도 있다. 1972년 12월 3일, 중국주재조선대사관 일등 비서 장인환(张仁煥)이 찾아와 장백현정부와 함께 대리수구에 매장되여있던 리계순의 골회를 여기에 옮기고 묘비를 세운 동시에 중조 두나라의 렬사로 명명했다. 1937년 봄, 헤싸즈거우 밀영 병원에서 병치료를 하던 중 일제토벌대에 체포되여 장백현성 감옥에 갇혔다. 놈들은 리계순의 입을 열려고 모진 고문을 들이댔고 같이 체포된 동지들의 수급을 베여 보이면서 위협을 했다. 그러나 추호의 동요도 없자 놈들은 1938년 1월 총살했다.

한생을 장백현 조선족의 교육사업에 바친 리권수(李权洙 72세 함경남도 북청군 성대면 창성리 태생)선생은 장백일대에서의 항일투쟁력사를 이야기한다.

《한일합방이후 조선의 반일무장단체와 의군들은 강을 건너 장백일대에서 투쟁을 견지했습니다. 장백일대에서 활동한 반일단체들로는〈대한독립광정단(光正团)〉,〈대한독립광복단〉그리고 홍범도가 령솔한〈대한독립군〉등이였답니다. 홍범도장군은 17도구에서 5리 상거한 곳에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이 독립군촌이였답니다. 집단부락을 하면서 독립군촌은 페허가 되였지요. 독립군들은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훈련을 하거나 싸움을 했으므로 농사군이자 군인이였거든요. 당시 장백현에 거주한 조선족들은 호구지책도 어려웠지만 너나없이 정기적으로〈의무금(义务金)〉을 납부했습니다. 당시 조와 밀 한섬 값이 7. 50전이고 하루 품삯이 30전, 일년 머슴살이가 30원에서 50원이였고 사립학교 선생의 월로임이 겨우 7원에서 9원이였는데 의무금은 빈부정도에 비추어 30원에서 10원이였답니다. 내가〈장백 조선족〉이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조사를 할 때 이미 작고한 려성욱(吕成郁)로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소사동강(小寺洞岗 -지금의 小梨树沟)에 살았는데 독립군들이 늘 그 집에 와서 부친하고 뭔가 상론을 했답니다. 그때 그는 나이가 어려서 잘 모르긴 했지만 보초를 서고 또 옥수수를 팔아왔는데 그 수입은 모두 군자금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장백에 독립단체가 세개가 있고 단체마다 군자금을 받아간데다가 또 단체내의 망나니들이 군자금을 받아서는 돈을 챙겨갖고 도망을 하는 페단도 있어서 조선족들한테는 여간한 부담이 아니였답니다. 그때 군자금을 사람들은〈벙어리 돈〉이라고들 했지요. 공개할수 없는 돈이라는 뜻입니다.》

일위(日伪 - 일제와 위만주국)의《압록강방변 혜산진 분대의 관할 대안(对岸)》이라는 당안에는 이런 대목이 기재되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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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산시에 세워진 기념탑
- 재만 한인이 장백, 무송을 근거지로 삼고 독립운동을 한다. 장백현성의 리창윤(李昌允), 리동백(李东伯), 18도구의 리태걸(李泰杰) 외 8명, 17도구 류병진(刘秉津) 외 7명, 16도구 강원동(姜元东) 외 15명, 금화진의 리룡록(李龙禄) 외 4명, 치부동 강명구(姜鸣九) 외 4명, 13도구 류래빈(刘来宾) 외 8명, 12도구 김치준(金致俊) 외 4명, 팔도구 최정호(崔正镐) 외 6명. 7도구 정봉도(郑凤道) 외 10명이다.

1922년 2월 20일, 12도구 죽별리의 독립군 50여명은 조선 후창군 동흥경찰주재소를 습격했고 같은 해 12월 5일, 가재수의 독립군 50여명은 후창군 포평경찰서를 쳤다. 1924년 11월, 팔도구 독립군 60여명은 후창군경찰서를 치기도 했다. 물론 무장습격의 규모는 작고 소멸한 적의 수자도 많지 못하지만 일본 침략자에 주는 위협은 컸다. 하여 1925년 6월, 일제는《재만한인》의 반일독립운동을 제거하기 위하여 봉천성 당국과《쌍방이 한인(韩人)을 압제할 방법에 대한 협의》를 맺었다. 동북군벌은《대외로는 일제와의 관계를 고려하고 대내로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의로 반일조직원들을 체포하고《련좌법(连坐法)》을 실시하였다. 장백현 리인규(李仁奎), 박준선(朴俊善), 김인현(金仁铉) 등 많은 반일지사들이 살해되였고 독립운동은 저조기에 들어갔다.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은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유서 깊은 고장이였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속에 그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가고 현재 귀동냥으로 남은 이야기들뿐이였다. 오래동안 계급투쟁을 선호해오면서 독립운동을 소외하다보니 오늘 독립운동연구에 있어서 생동하고 믿음직한 자료를 줏는다는것은 참으로 바다에서 바늘 찾기였다. 하지만 항일련군활동부터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1936년 6월,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군장 왕덕태(王德泰)는 무송현 동강(抚松县东岗)에서 회의를 하고 2군 1사(후에 4사로 개편)와 3사(후에 6사로 개편)는 무송, 안도, 림강, 장백 등지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달 6사의 주력 200여명은 장백현 헤싸즈거우에 근거지를 건립하고 장백현과 국경 연안의 조선 각지에 조국광복회 지하조직을 세웠다. 6사의 90% 인원은 조선족이였고 그들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웠다. 1936년 6월 4일, 보천보전투시 적의 총탄에 희생된 리경희는 운명직전에《여기가 조국 땅이라지요? 그래도 조국 땅을 밟아보았으니 다행입니다. 모두들 내 몫까지 잘 싸워주세요》라고 유언을 남겼다.

리권수선생은 말한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천교구에 살았디요. 늘 우리 부락으로 항일련군이 왔디요. 흰 광목에 참나무 껍질을 우린 물로 염색한 국방색 옷을 입고 무릅까디 각반을 쳤는디 총을 메고 와서는 어른들한테 삐라를 주고 가더군요. 그게 아마 1938년 가을일거우다. 집단부락이 서서 천교구에 있던 일본군 혼성려단이 이도강으로 이사해서 우리가 이사짐을 실어가게 됐디요. 천교구에서 이도강까디 20리 길이였수다. 짐을 실어가고 돌아올 때 천교구에 남은 수비대에 가는 물건들을 발구에 실고 돌아오게 됐디요. 좁쌀이며 성냥이며 소금, 명태 등이였수다. 절반길을 줄여왔는디 숲속에서 항일련군 다섯명이 나오더니 우리한테 발구의 짐을 지우고 그들도 지고 백두산 쪽으로 인도하데요. 30세 돠우의 김디(지)도원이라는 사람이 인솔자였는데 아주 싹싹하고 례절이 밝았디요. 나무통을 밟고 어두울 때까지 숲길을 걸어가니 딤들을 벗어놓으라 하고 돌려보내디요. 항일련군은 독립군처럼 의무금을 받아가는 법이 없었시요. 일제 주구거나 일제 기관을 쳐서 생활필수품을 로획했을뿐이였수다.》

장백진에 사는 조창원(趙昌元 75세 장백현 16도구 태생)로인은 장백일대의 항일련군의 투쟁일화들을 직접 겪기나 한것처럼 구수하게 이야기를 엮어갔다.

《당(장)백 사법계 두(주)임으로 오상수라는 사람이 있었디요. 강원도 사람인데 항일에 뜻을 두고 있었나 보데요. 한번은 항일군 두명이 답(잡)혀 왔디요. 무도(조)건 통(총)살이라 이거우. 오씨가 그날 출근할 때 대당부 며칠 먹을 만두를 시켜 놓고 이리 이리 해라 하고는 출근해서 순사한테 명하여〈되범〉을 데리고 가서 다기 딥 당닥을 패라고 했디요. 나무 패는것을 디키고 안닸기 답답했던 순사가 앞딥으로 간 사이 안해가 만두 보따리 디어 두며 가라고 눈티를 했다우. 그날 순사가 탈딕되(직죄)로 테포되였디우. 광복후 도선 둥앙(중앙)에서 두 사람이 와서 오상수 았는디 이미 별세한 뒤라 대성통곡 하더라 하데요. 그 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둥앙에서 큰 다(자)리 했나 보데요.》

장백진 정미소에 백룡기(白龙基)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원래 항일련군 6사의 통신원이였다. 13도구전투에서 일본군한테 포로가 되였는데 간수소 손(孫)소장이 살려주었다. 문화대혁명 때 손씨가 력사문제로 투쟁을 맞게 되였는데 백씨가 증명을 해서 무사했다. 70년대 오상수를 데리러 왔던 조선 중앙 사람들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백룡기를 우연히 만나서 조선으로 모셔갔다.

독립군과 항일련군은 리념이 다를뿐 모두다 항일성전의 불비속에서 용왕매진했다. 그들은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사심없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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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산우에 있는 혁명렬사릉원
혁명렬사릉원을 떠나 탑산을 내리다가 옥수수밭속에 외롭게 쓸쓸히 묻혀있는 독립운동가의 무덤앞에서 나는 저도 모르게 발목이 잡혔다. 다같은 항일을 하다가 목숨을 바친 용사이면서도 리념이란 차이때문에 렬사릉원에 끼지 못한 아쉬움이 가슴 복판을 쩡~ 울려주었다.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여가고있는 오늘 나는 조만간에 리념을 초월한 진정한 민족적 차원에서의 항일투쟁사가 엮어지여 하나의 목표를 위해 피를 흘린 렬사들이 한자리에 모셔지기를 새삼 기원한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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