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2부 압록강 2천리 - 제1장 국경의 강(3)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6-05 09:41:18 | 최종수정 2018-06-05 10: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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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차고 땅이 거친 만주땅에 들어서면 살길이 열릴것만 같더니 시름시름 앓던 할머니가 마선(麻渲 -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에 이르러 객사했다. 집안시 쌍차(双差)에 이르니 고마운 중국인이 좁쌀죽을 쑤어 리재민들을 대접했다. 쌍가마가 허기진터라 과식을 하고 체증을 만나 또 며칠후 죽었다. 그들은 또 무덤을 남기고 신개하(新开河)로 떠났다. 사나운 눈보라속에 걷고 걷다가 병길의 처는 등에 업은 청돌이를 젖 먹이려고 가슴으로 돌렸다. 그런데 청돌이는 어머니 등에서 얼어 죽었던것이다. 그들 일가는 무덤 세개를 남기고 화전(桦甸)에 이르러 이사짐을 풀었다.

기재에 의하면 1905년 조선 변민들이 장백, 림강, 집안 등지에 이주한 수는 8,700여호, 39,400여명이고 그중 장백현 경내로 이주한 자는 1,350호에 5,630여명이였다. 1929년은 장백현에 조선족이 가장 많은 시기였는바 4,257호에 24,349인이였다. 1985년의 통계에 따르면 장백현 조선족 이주민 후손들은 13,105명으로서 전 현 인구의 17. 06%를 점한다.

취재수첩을 펼쳐들고 고향을 물으면 대상자들은 누구라 없이 부모들의 이주 전 조선의 주소를 댄다. 이주민 일세들은 거의 모두가 북망산에 묻혔지만 그들의 애향심은 2세, 4세까지에도 맥을 이어가고있음이다.

장백진에 살고있는 리태원(李太元 1915년 조선 강원도 호양군 태생)은 말한다.

《우리 집은 내가 13살 나던 해 정월 16일에 고향을 떠났수다. 아버지(李德淳 1873-946)는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선산을 지키시다가 막부득이한 처지에 이르자 이사짐을 꿍졌던거우다. 만주를 목적하고 떠나긴 했어도 아버지는 조선을 떠나기가 아쉬워 함흥에 이르러 신흥군 전기회사에 가면 돈이 벌린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발길을 돌렸지 뭐유. 신흥군 장진시내에 들어서자 전기회사는 건설중이고 굴일이라서 열에 아홉은 죽어서 나온다는거 아니겠수다. 그래서 삼수 개원이 살기가 좋다기에 또 그리로 가네요. 목숨만 부지할수 있다면 조선을 떠나지 않으려는 심정이였수다. 그런데 길에서 개원에서 이사를 나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일곱 식구가 갔다가 홀로 살아나온다는거 아니겠수. 더는 조선에서 살 곳을 찾지 못하자 아버지는 우리 일가 여섯을 거느리고 혜산을 통해 이리로 왔다우다. 등 시리고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야 누군들 고향을 떠나기가 소원이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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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향봉(望乡峰) ⓒ 중관춘온라인(中关村在线)
탑산 령광탑 오른켠으로 100여m 되는 곳에 망향봉(望乡峰)이라고 있다. 만청(滿淸)년간에 산동, 하북 등지에서 장백으로 이주해온 한족 이주민들은 매년 중양절이면 이 봉우리에 모여 서남쪽을 향해 꿇어 앉아 절을 올리며 고향과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망향봉 옛터에 세워진 비석에는《그제날 고향이 그리워 눈물을 짓더니 오늘은 고향을 바라보며 환히 웃네》라는 시구가 새겨져있다. 비록 고향을 멀리 떠난 몸이긴 해도 아무 때건 기차 타고 떠나면 가닿을수 있는 그들의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하겠다.

하지만 강건너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려권이나 통행증이 없으면 갈수가 없고 더구나 한국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혈육이 없거나 년령의 제한으로 애만 태우는 그들의 애향심은 날이 갈수록 애틋해만 간다.

《고향이 원쑤웨다.》

리태원로인은 한탄소리를 길게 뽑으며 피눈물로 얼룩진 과거사를 이야기했다.

《압록강을 건넌 우리 집은 탑전(오늘의 장백현성) 사탕골로 들어갔지우다. 부친은 연치삼(조선족. 1년 품삯 60원)네 집으로, 형님은 로창수(조선족. 1년 품삯 30원)네 집 머슴으로 들어가고 어머니는 삯일을 했수다. 만 4년을 머슴으로 살자 밭을 장만하고 온 집 여섯식구가 모이게 되였수다. 그때 농사라야 밀, 보리와 감자였수다. 그나마도 배불리 먹을수 없었다우다. 그래서 나는 16살 나던 해에 김세익 집으로 데릴사위로 들어갔지우. 입을 덜려는거였수다. 저 로친(金曾孙 76세 사탕골 태생)이 그때 겨우 11살이였수다. 5년동안 처가살이를 하노라니 애어린 처가 숙성을 하데요. 그래서 결혼을 했수다. 지금도 룡강향에서는 밀과 감자농사로 살아간다우다.》

지금도 감자와 밀농사에 매달려 산다는 리태원로인의 말에 떠밀린 나는 6월 6일 오후 세시에 장백현 룡강향 이도강촌으로 가는 뻐스에 몸을 얹었다.

룡강향은 유서깊은 고장이였다. 1915년 당시 소덕수(小德水)에는 독립군 군비총단이 있었고 1936년에는 항일련군 제2군 제6사가 헤싸즈거우(黑子沟)와 홍두산에 밀영을 세우고 대덕수, 소덕수, 신창동, 관방즈에서 일본군과 위만군을 호되게 족쳤다. 이에 대비하여 일제는 지세가 험요한 이도강으로 부근 산재호들을 귀툰(归屯)시키고 경찰서, 경찰유격대, 토벌대, 삼림경찰대, 헌병대를 주둔시키고 장백으로부터 이도강까지 길을 닦았다. 당시 이도강의 호수는 무려 5백호였다고 한다.

뻐스는 바로 일제가 항일련군 토벌을 위해 닦은《토벌길》로 달리고있었다. 광복후 이 길을 넓히고 수리했다고는 하지만 좁고 울퉁불퉁해서 뻐스의 운행속도는 달구지에 못지 않았다. 현성에서 고작 28km 지척인데 장장 두시간을 달렸다.

룡강향은 백두산 천지와 90km 상거한 고한산구였다.

맑은 날이면 웅위로운 백두산이 망망한 숲에 떠받들리여 눈앞에 다가와 서는 하늘아래 첫 동리이다. 향경내에서 지대가 제일 높은 홍두산 해발은 2,012m, 가장 낮다는 이도강촌의 해발고도 1,260.7m, 무상기는 아득바득 90일좌우란다.

밭에서는 사람들이 이랴 낄낄 밭갈이를 하고있었다. 올해는 예전보다 계절이 며칠 늦어졌다고 하는데 벌방보다 철이 한달 차이는 나는것 같았다.《옥수수, 콩도 안됩꾸마. 도마도도 익지를 못하구. 봅소, 지금도 사람들이 털내의를 입고들 있지 않슴둥.》

향정부 간부식당에서 식모로 있는 원채봉(元彩凤 44세)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나는 오싹하니 랭기를 느꼈다. 현성 려관에 짐을 보관시키고 옷바람으로 온 나였던것이다.

그날 밤 나는 허룡학(许龙鹤 73세 조선 량강도 삼수군 자산면 태생)로인을 방문했다.

《내가 세살에 모틴(모친)을 일타(잃자) 부틴(부친)은 나를 갑산 누이 딥(집)에 두고 두분 형님을 데리고 당백현(장백현) 18도구 이던동(이전동)으로 떠났디우. 18살 나던 해 형님이 날 도망골로 데려다가 더(저) 노틴(노친)네 딥에 데릴사위로 딥어두(주)었는디 10년을 살아야 결혼을 시킨다 이거우. 석달을 겨우 살고 당인(장인)과 말하고 도선(조선)으로 돈벌러 갔디우. 그런데 광복을 석달 앞두고 딩병(징병)에 뽑혀서 일본 구두(구주)로 갔디 뭡니께. 그해 7월 2일 미군 폭격에 부상을 입고 티료(치료)를 받다가 광복을 마닸수. 이듬해 3월 함남 대표가 와서 부산으로 해서 고향에 왔다가 도망골에 와 단티(잔치)를 했디우. 52년도에 이도강에 이사하고 디금까디 붙박여 사우다.》

허씨가 이사온 당시 이도강에는 70호 인가에 한족이 겨우 2호였다고 한다. 지금은 2백호 인가에 조선족과 한족이 반반씩이다.

《고산디구라 소출도 별로 안된다우. 보리는 한무에 백근, 귀밀은 150근, 밀도 닥(작)황이 도(좋)와야 3백근이디우. 감다(감자)만은 달 돼유. 디금은 딤(짐)승이 덕(적)어서 덜하디만 십년던까디만 해도 멧돼디(지)와 곰의 성화에 애를 먹었디우. 7월부터 돼디가 감다밭을 뚜디기 시닥해유. 돼디가 뚜디고 디난 밭은 호리딜을 한것가티 번딘다구유. 귀밀과 밀밭에도 돼디가 덤비디만 곰이 더 무서워유. 곰은 밭에 들면 올방다를 틀고 안다서 앞발로 곡식을 끌어안고 훑어 먹는데 담간이면 거덜이 나디우. 그래서 7월부터 가을거디가 끝날 때까디 당(장) 밭에 나가 살아야디우. 놋양푼이나 털당(철장)을 밭머리에 달아매고 티면서〈우여, 우여- 소리를 틴다구요. 농사털이면 온 산이 털당울림과 우여소리로 꽉 탄(찬)다구요.》

9월말부터 이 고장엔 눈이 내린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나면 마을의 장정들은 사냥을 떠났다. 화승대를 메고 개를 앞세우고 백두산 밀림속으로 들어간다. 이 고장엔《사냥아리랑》이 전해지고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 랑군 령을 넘어 사냥 가네
랑군님 무사히 돌아오세요
대보름 달빛아래 축배 듭시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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