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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1부 두만강 천리 - 제17장 키잡이(2)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5-24 09:44:08 | 최종수정 2018-06-05 10: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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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범씨는《장고봉저수지》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 낚시로 떠올린 붕어를 초를 쳐서 술안주해서 점심들을 먹는데 갈매기 한마리가 십여메터 앞 호수에서 우리가 금방 따서 버린 고기밸을 쪼아먹었다.

- 갈매기는 비둘기보다 좀 더 컸다. 풍만한 몸체는 회색을 띠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고운 색갈의 무늬가 혹간 지나가며 조화돼 갈매기는 더없이 아름다왔다. 게다가 부리끝에 빨간 점이 있어서 아가씨들의 연지 바른 입술을 련상시켰다.

- 호수옆의 사초봉늪에 련꽃이 활짝 피여있는것도 무척 아름다왔다. 주먹만큼씩한 련꽃은 푸른 련꽃잎에 받쳐서 연분홍, 노란빛, 흰 얼굴을 귀엽게 자랑하며 하냥 웃고있었다. 낮이면 활짝 피였다가 저녁이면 봉오리를 짓고 이튿날 다시 해를 보고야 피는 련꽃은 수줍음을 타는 예쁜 아가씨를 방불케했다.

- 호수의 서쪽은 모래산이였다. 풀 한포기 자라기 어려운 모래산은 순수한 사막지였다. 바다에서 날려온 모래가 산을 이루었는데 모래산은 바람에 의해 부풀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는것이다.

류원무선생은《방천》이라는 글에서《장고같이 생겼다고 장고봉, 산은 별로 높지 않고 산세도 험하지 않지만 남다른 모래산을 앞에 두고있어서인지 소나무, 가둑나무 록음이 한결 싱싱하고 진하다. 사막을 방불케하는 하얀 모래톱, 금빛이 눈부신 모래산, 그것들 또한 푸른 산, 푸른 호수, 푸른 들판에 안겨있어서 더더구나 이채롭고 운치가 있다. 조물주의 조화가 어쩌면 이렇게 신통력이 있을가.》라고 장고봉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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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천국경 망원초소
장고봉과 사초봉을 풍만한 녀인의 젖가슴이라고 하면 두 봉우리아래에 펼쳐진 벌은 미녀의 배, 호수도 품고 기름진 들판과 소와 양떼가 흐르는 초지도 안은 풍요로운 이 벌을 사람들은 방천벌이라고 한다. 청나라 동치년간(同治年間)에 경흥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인들이 자리잡고 마을을 세웠을 당시 이곳은 버들방천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불려진 이름이《버들방천》,《휘우듬히 동남으로 뻗은 장고봉산발과 동으로 흐르는 두만강이 교차되면서 닭부리같은 등변삼각형을 이룬 방천땅이 로씨야와 조선땅에 쐐기를 박은것 같기도(류원무《방천》에서)》하고 조선과 로씨야의 사이에 끼인 목을 방불케한다고 해서《동삼성정략(东三省政略)》에서는《방천목(防川項)》이라고 기재하기도 했다. 원래의 만족들이 지어 부른 이름은 헤무즈(黑木积)-들보리(野大麦)로 보리농사가 잘되였던 모양이였다. 1938년 당시 방천엔 62가구 조선인들속에 4가구 한족들이 끼살이를 했었지만 왕매춘(王梅春)은 지주였고 조선인 거의가 그의 소작농이였다고 한다. 곡광화(曲光华)는 선주(船主)였고 호(胡)씨는 채소장사군, 팽희(彭喜), 팽균(彭均) 형제는 땅이 별로 많지는 않았지만 자작을 할수 있었단다. 1938년 장고봉사건이후 일제는 장고봉일대를 금지구역으로 봉하고 양관평, 회충원, 사초봉과 함께 방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광복이 나고 이태가 지나서 다시 꾸역꾸역 모여와 황페했던 마을을 재건하면서《버들방천》,《방천목》에서 버들과 목을 빼고 마을 이름을 방천이라고 했다. 그런데 음역을 따른 한어표기가《防川》- 변방의 산천이라는 뜻으로 되여버렸다.

방천은 마을 입구에 세운 돌에 새긴 글《방천변쇄(防川边)》라고 했듯이 중국에서 최동단에 자리한 첫 마을이다. 5리길을 동으로 더 가면 왼쪽편은 로씨야의 무연한 뽀시예트초원과 하싼호, 오른편은 두만강 너머 조선 두만강시와 홍의리가 지척에 있어서《닭울음소리가 삼국에 울리고 개 짖는 소리가 변강을 놀래(鸡鸣闻三国, 犬吠三疆. )》우는 고장이다. 현재의 인구는 66가구에 300여명, 한개 중대의 군부대가 마을에 주둔하고있다.

개혁개방이 된지가 십년세월이 넘었어도 방천은 예전의 농촌마을 모습 그대로였다. 30키로메터 상거에 있는 경신만 하더라도 도시분위기가 다분해 어딘가 거부감을 주었지만 방천은 아름다운 수채화를 방불케하는 아름다운 경치보다도 고유의 민족문화를 엿볼수 있어서 여간 푸근한 기분이 아니였다. 두만강연안의 조선족마을에서도 방천에서 나는 우리 문화를 가장 집약적으로 볼수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도시바람은 여기에도 불어와 처녀가 바닥이 나고 기회가 있으면 도시나 외국으로 돈벌러 가려는것이 마을사람들의 심정이기도 했다. 전통문화는 도시문명으로 전이하면서 진통을 겪고있는것이였다.

북경대학 김경일(金京一 42세)교수가 북경 세미나에서 했던 말이 뇌리를 쳤다.

《이민시기의 문화선택은 특정된 사회문화적 배경에 의해 그 문화공간을 주로 농촌에 두었으며 농촌문화를 기반으로, 복합적 요소를 내용으로 전통문화를 고수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이 문화과정에 객관적으로 보다 보수적이고 페쇄적인 문화선택이 이루어져 한면으로는 전통문화의 고수와 발전에 유리한 토대를 이루었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제반 중국사회에 대한 적응능력이 강화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화는 세찬 변혁속에서 자기 문화울타리가 허물어져가고 정합을 이루었던 제반 문화구조가 깨뜨려져가고있으며 그에 따른 새로운 적응을 각자 부동한 문화적 반응으로 보여주고있습니다.》

방천에 주둔한 군부대 중대장은 특별히 병사를 파견하여 우리를《토자패(土字牌)》까지 안내하게 했다.《토자패》가 세워진 장고봉산발의 코숭이에는 중국의 제일 동쪽《중로조변경의 마지막 역》으로 일컫는《동방전초(东方前哨)》가 있다. 7명 군인이 밤낮으로 지켜서있는 초소의 망원루(望远楼)앞 마당에는 국무총리 리붕과 국가주석 강택민이 쓴 제사를 돌에 새겨 세운 비석이 있었다.

1991년 7월 8일 장령자에서 연변군분구 변방부대에 쓴 강택민주석의 제사는《동북의 전초를 지켜 중화의 위풍을 떨치라. (守东方前哨, 扬中华国威)》는 내용이였다.

같은 해 8월 7일 방천에 시찰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리붕이 쓴《국경선상(国境线上》이란 제목의 제사는《도문강은 동으로 흐르고 / 토자패앞에서 길이 끊겼네. / 초소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니 / 다시 또한 옛일을 돌아보게 되네. (图们江水向东流, 土字牌前路断头, 登上哨所见沧海, 旧事不堪再回首)》이다.

망원초소의 맨 웃층에는 군용 망원경이 있다. 눈을 대고 바라보면 천여년전에는 발해의 땅이였고 1860년 이전까지만 해도 훈춘관할구역이였던 울라지보스또크가 가물가물 보이고 발아래 뽀드깔나야시에 사는 로씨야인의 유난히 큰 코까지도 가려보인다. 그리고 지척으로 두만강물우에 가로놓인 조로국경철교의 남쪽켠 산비탈에 길게 늘어선 조선의 두만강시 실골목까지도 보인다. 그리고 더욱 가슴 설레게 하는것은 15키로메터밖에서 푸른 물결 굼실대는 일본해에 떠있는 어선이 시야에 잡히는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로 천여메터 앞 철교에 반도 이르기전에 두만강은 중국의것이 아니다. 로씨야와 조선의 국경으로 된다.

중국땅에 서서 동시에 로씨야와 조선을 굽어보고 일본해를 바라보노라면 방천은 동북아 금삼각주를 장식한 하나의 눈부신 보석이라는 말에 갈채가 간다. 이같이《연변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처하고있었음에도 오래동안 그것이 민족경제발전을 제약하는 주요한 요소로 되였다. 랭전시기 연변은 제국주의,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전초진지로〈군사변방〉,〈정치변방〉측면이 강조될뿐이였다.》(박승헌교수가 북경 세미나에서 한 발언)

작달막한 키에 동실한 얼굴을 가진 군인 정군(丁军 19세)이 중대장의 파견을 받고 방천에서 온 군인을 대신하여 우리를 토자패께로 안내했다. 토자패는 망루에서 약 5백메터 동쪽에 있었다.

《1886년 청나라 북양사 대신 오대징(吴大徵)이 짜리로씨야 연해주성 성장인 빠라노브와 함께 이 토자패를 세웠답니다. 토자패는 흙〈토(土)〉로 국토를 밝힌 국경경계비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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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천에 세워진 토자패
1993년에 연길에서 참군하여 목단강에서 근무하다가 금방 이리로 왔다는 정군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토자패》에 깃든 치욕의 력사를 이야기했다.

1861년 중로쌍방이 체결한《우쑤리강으로부터 바다까지의 변계기문》의 규정에 의하면《토자패》는《두만강어구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세워져야 했다. 그러나 짜리로씨야측에서는 패말을 두만강어구에서 짜리로씨야수로 22리(23키로메터에 해당함) 떨어진 곳에 세움으로써 바다로 나가는 중국의 통로를 막아버렸다. 1885년 오대징일행이 청정부의 명을 받고 짜리로씨야와 담판을 진행, 오늘의 이 자리에 토자패를 세우게 되였던것이다.

그번 걸음에 국경선 돌패말과 국경표지를 고쳐세우고 흑정자지역과 두만강 항행권을 되찾은 오대징은《룡호(龙虎)》라는 제사를 썼는데 그것을 새긴 비석이 지금 훈춘시공원 정자에 세워있다. 원래 도문시 량수진에서 동쪽으로 3.5키로메터 되는 곳에 세워졌었다는《룡호석각》은 1940년 길닦이를 하면서 길옆으로 밀렸다가 1986년에 훈춘시 차대구 북쪽 언덕에 한동안 세워있었다. 룡호란 뜻은 룡이 머리를 쳐들고있고 호랑이가 주시하고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룡이 서리고있고 호랑이가 걸터앉았다는 뜻으로 변강을 지킨다는 말이 된다.

그때로부터 중국사람들은 대대손손 룡과 호랑이처럼 두려움 없이 국토를 지켜왔다. 오늘 이 토자패의 위치를 지켜가고있는 정군한테 군생활이 고달프지 않는가고 물었다. 그는 따분하고 고생스럽다고 말했다. 물은 자동차로 방천촌에서 길어오고 또 전기가 없어서 텔레비도 못본다는것이다. 해가 지면 반도체를 듣거나 초불아래에서 책을 본다는것이다. 이제 일년이 지나면 퇴대하는데 군생활이 끝날 때까지 군인의 천직을 지켜 열심히 근무할것이라고 했다.

남향으로 22.3도각으로 세워진 토자패의 높이는 1.44메터, 너비는 0.5메터, 두께가 0.22메터인데 정면에《토자패》란 글자가 세로 새겨있고 그 오른쪽에《광서 12년 4월 립》이라고 새겨있었다. 그리고 로씨야쪽면에는 로씨야 문자《T》가 새겨져있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두만강을 따라 바다입구까지의 거리는 15키로메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땅이다.

1996년 여름 두번째로 방천에 갔을 때 나는 로씨야와 조선의 공동 국경선이 시작되는 철교부근까지 유람선을 타고 갔다. 기름이 둥둥 뜬 강물은 콜타르 빛이 났다. 무산광산에서 배출하는 돌가루 씻긴 물이 두만강을 누런 황토빛으로 만들었다면 중국 룡정시 개산툰팔프공장, 도문시 석현종이공장 페수가 직접 두만강을 오염시키고 또 룡정시 등 여러 도시의 공장에서 배출하는 페수에 오염된 해란강, 부르하통하 등 지류들이 두만강에 합류되면서《두만강 푸른 물》은《두만강 기름물》,《두만강 흙탕물》로 되였다. 그 물속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들도 허리가 탈린 병신으로 변신, 석유내가 나서 도저히 먹을수 없게 되였다.

오염된 두만강물처럼 연변조선족은 세계화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이민시기 좁은 울타리안에서 맴돌며 시대에 뒤떨어진 삶을 살고있으며 두만강 물고기처럼 변신하여 석유내가 나도록 동화되여있다.

이제 방천에 년간 40만톤의 화물을 수송할수 있는 부두가 건설된다고 한다. 또 4백톤급 선박이 접안하는 항구로 발돋움한다는것이다. 그렇게 되면 연변의 경제발전은 의외로 빨리 진행될수도 있다. 심수나 해남도 못지 않게 인구류입이 급증할것이다.

유람선은 저만치 조로국경철교를 앞에 두고 머리를 돌렸다. 우리한테는 여전히 바다길은 막혀있었다. 동북아경제권의 중심지역으로 부상되여 민족경제도약을 실현할수 있는 기회를 얻긴 했지만 일본해로 나아가는 통로가 개통되지 못하고있는것이다. 바다길이 트이기전에는 연변은 지리적우세를 제대로 발휘할수 없게 된다.

하지만 오라지 않아 배길은 열릴것이다. 할아버지세대가 타고 강을 건너던 그런 쪽배가 아니라 먼 바다로 항행할수 있는 큰배가 저 철교를 지나 동해로 들어갈것이다. 두만처녀와 함께 가야총각이 가서 산다는 동해의 룡궁으로말이다.

그런데 그 배의 키는 누가 잡을것인가?!
암초를 헤치고 파도를 헤가르며 민족사회를 바른길로 인도해갈 그런 키잡이가 구경 누구일가?!
아, 두만강 푸른 물이 그립다.
손을 잠그면 파란 물감이 묻어나는 하늘같이 맑은 두만강이 그립다.
그리고 노 젓는 배사공이 아니라 키 잡은 선장이 그립다.
두만강 푸른 물을 되찾아 이 땅에 생명수로 대여줄 선구자가 그립다.

- 제1부 끝 -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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