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1부 두만강 천리 - 제17장 키잡이(1)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5-22 12:31:26 | 최종수정 2018-05-21 12:3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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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나는 두번째로 경신진으로 갔다. 초행길엔 홀몸이였지만 그번엔 일행이 한국 김윤찬선생, 시인 박장길과 소설가 최국철씨 등 일행이 여럿이였다. 경신진 정창권진장이 이도포에 주둔한 군부대에 가서 통행증을 만들고 방천으로 안내했다.

렴아가씨가 운전하는 라다는 경신진을 떠나서 10여키로메터 달려서 권하에 이르렀다. 바로 여기 길목에 설치된 군초소에서 신분증과 통행증을 검사했다. (그해 여름부터는 국내인한테는 통행증이 취소되였다) 정진장이 군부대의 군관들과 무랍없는 사이인지라 검사는 형식에 그쳤다. 상위견장을 단 대대장이 병사를 파견하여 우리 일행을 권하국경다리 중간까지 안내해주었다.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권하국경다리는 1936년 11월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놓은것인데 다리의 너비는 6메터, 총 길이는 500메터, 중조 두 나라가 각각 250메터씩 나누어가졌는데 중국측은 빨간색, 조선측은 흰색으로 칠을 했다. 다리가 받는 재중량(载重量)은 60톤이다. 1945년 쏘련군이 조선으로 진군하면서 60톤 무게의 땅크가 줄쳐서 다리를 건너는바람에 다리가 20센치메터 갈아앉았다고 한다. 다리건너는 원정리. 원정리 앞산을 넘어서면 유명한 아오지탄광이 있다. 조선의 라진과 선봉은 바로 이 다리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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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봉되기전의 권하국경다리
콩크리트다리 반은 중국이고 반은 조선인데 중국구간의 중간에는 엄지손가락만큼 굵은 철근으로 만든 쇠사슬을 다리표면에서 한자높이로 가로 막아놓았다. 로지심의 주먹처럼 큰 자물쇠가 쇠사슬 량끝을 이어서 잠겨있었다.

웬만한 메로 때려도 부셔지지 않게 육중한 자물쇠는 나의 마음에 여간한 중압감을 주는것이 아니였다. 국경이란 이같이 사람의 발걸음을 얽어매는 옥노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리 두만강에서 국경다리는 권하다리까지 합쳐서 열개 있다.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와 덕화진 남평, 룡정시 삼합진 삼합과 개산툰진 개산툰, 도문시 국경철교와 공로다리 그리고 량수, 훈춘시 사타자향 사타자와 영안향 만자, 경신진 권하 등 다리이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개방하지 않은 다리는 량수와 권하국교였다. (1995년 가을부터 비로소 자물쇠를 뚜드려 마스고 권하국교 왕래가 시작 되였고 1997년에는 다리 건너 조선 원정리에 국제자유시장이 서기도 했다.)

다리아래 두만강은 꽁꽁 얼어있었다. 한겨울 뼈를 에이는 북풍은 모래를 휘몰아 하늘같이 파란 강판 얼음을 쓸고 갔다. 강 건너 조선쪽에는 모래언덕이 산처럼 덩그렇게 쌓여있었다.

통행이 금지된 다리우에 서서 발밑에 떵떵 얼어붙은 두만강을 굽어보는 나의 마음도 웬간히 얼어있었다. 이제 바야흐로 자물쇠를 부시고 이곳에 통상구가 선다는 권하에 이르러 나는 국제화시대, 정보화시대, 아세아태평양시대라는 인류발전추세에 떠밀려 우리 민족 군체와 함께 나자신도 력사적 전환점과 시대의 교차점에 와있음을 실감했다.

전통사회가 궁극적으로 현대화사회로 탈바꿈하는 준엄한 시점에 와있는것이다. 력사의 이 준엄한 시기는 우리 민족한테 민족문화를 도약시킬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하고 또한 민족문화가 스러질수도 있는 심각한 위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을 죄이고있었다.

라다는 강역 산비탈을 굽이굽이 에돌아간 큰길을 따라 달렸다. 왼쪽은 로씨야, 오른쪽은 두만강을 사이 두고 조선이다. 이제 10키로만 가면 두만강 하구의 마지막 변강마을 - 방천이다. 3국 접경지대를 달리면서 나는 느닷없이 그 전해(1994년 8월) 북경에서 열렸던 중국조선족청년학자세미나 -《21세기에 대비한 우리의 자세》를 머리에 떠올렸다. 조성희(趙成姬 42세)씨의 발언도 귀전에 쟁쟁 울려왔다.

《해방이래 조선족은 중국사람들이 받았던 고통 외에도 민족의 분단이라는 고통도 간접으로 받았습니다. 당당한 중국사람으로 나섰으면서도 민족차별의 아픔도 겪어야 했고 한반도의 남북과는 동족이면서도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답니다. 그렇다면 구경 우리는 누구입니까?》

구경 우리는 누구인가?
흘러가면 다시 돌아올수 없는 기회를 어떻게 포착할것인가?
생사존망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것인가?
나의 마음 천정엔 꺽쇠와 같은 의문부호가 한겨울 고드름처럼 디룽디룽 매달렸다.

방천촌의 양관평(阳关坪)에 이르러 정창권진장이 문득 차를 멈추라고 했다.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서쪽과 서남으로는 두만강이 흐르고 동으로는 중로국경과 잇닿은 곳이다.

큰길 옆 륙지국경에는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그리고 철조망옆 콩크리트 기좌(基座)우에 세워진 화강암 비석 정면에는 가로《양관평방천로제(阳关坪防川路堤)》라고 씌여있고 맨 아래에《1983년 12월》이라는 시간이 새겨져있었다. (1999년에 다시 이 길을 지나면서 보니 비둘기조각을 한《유엔세계공원》석비가 새로 세워졌는데 1999년 4월 22일에 세웠다고 씌여있었다. )

제방뚝길 저켠에도 똑같이 너비 1.3메터, 높이 0.93메터, 두께 0.60메터 되는 기좌우에 너비 1메터, 높이 0.70메터, 두께 0.225메터인 패신(牌身)을 올린 비석이 세워있었다. 두 비석사이의 거리는 880메터, 바로 제방길의 길이와 같았다. 깊은 두만강을 막아서 쌓은 이 제방의 너비는 5메터란다.

청나라 말과 민국초기엔 바로 이 구간으로 중조국계선이 지나갔는바 현재 제방길의 동에서 서에 이르는 너비 2천메터좌우 지대는 중국령토였다고 한다. 그런데 1914년 홍수가 지면서 두만강이 조선 성안봉(城安峰)에 막혀서 사회도(四会岛)를 에돌아 중국측 강안을 충격해 물길이 중국령토를 침범했다. 하여 물길은 점차 동, 서의 2천메터 구간을 채우고도 모자라서 1954년 봄에는 중로변계선에 접근했다. 1955년 로씨야는 국계철조망을 로씨야경내로 20메터 물려주었다. 그때로부터 방천으로 가는 길은 로씨야계에 있게 되였다. 1957년 이 구간의 3백메터 되는 땅이 물에 뜯겨 이듬해 로씨야측은 철조망을 2백메터 더 들여갔다. 1954년 가을부터 1964년까지 방천길은 로씨야경내로 통했다. 1965년부터는 중국정부에서 쏘련땅을 빌어서 통행하게 되였는데 빌린 길 호선(弧线)의 길이는 557메터나 되였다. 1981년 중국 국무원은 두만강을 막아 제방길을 내는 공정을 결정, 이듬해 4월 1일에 시공을 시작해서 이듬해 10월에 준공한 이 제방길의 총 투자액은 780만원, 총 공정량은 264, 639립방메터라고 한다.

쇠가시가 다닥다닥 붙은 국계철조망을 만져보았다. 등골이 섬뜩 소름이 끼쳤다. 철조망 건너는 로씨야땅, 자연 그대로 흐르는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마주한 중국과 조선은 나라가 다르지만 평화로운 감을 주지만 륙지에 철조망으로 금을 그은 국계앞에서는 불안한 심정을 걷잡을수 없었다. 예전에 로씨야땅을 빌어서 통행을 할 때 방천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557메터 쏘련길을 에도는 때면 숨이 한줌만 했다고 한다. 총을 쥐고 선 로씨야 군인이 등뒤에 대고 금시 총을 갈길것만 같은 공포에 덜미를 잡혔다는것이다. 그러다가도 중국땅에 들어서면 막혔던 숨이 나가며 잔뜩 오그라졌던 가슴이 금시 펴졌다는것이다. 비록 두만강 건너 눈앞에 고국을 바라보면서도 중국국민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군 했다는것이다.

흑룡강신문사의 박문봉부장은 북경 세미나에서 말했다.

《우리는 비록 이민민족이기는 하나 력사의 행정에서 이미 중화민족의 일원 - 조선족으로서의 떳떳한 존재가치를 실현하였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맨주먹으로 동북땅을 개척했습니다. 아울러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이룩한 업적으로 우리 민족의 위치를 확립했습니다. 한국인도 조선인도 그리고 한족들과도 구별되는 우리는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의 현실적인 존재와 고국을 갖고있는 지구촌 코리아민족의 일부분으로서의 본체적인 존재를 동시에 지닌 모순체입니다. 망향의식, 타향살이의식은 이 땅에서의 주인공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자멸의식입니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들은 불법체류 취체를 받고있는 실정이며 앞으로 통일된 한반도 역시 2백만 우리를 절대 받아줄수 없을것입니다.〈내가 살고있는 이 땅의 주인은 바로 나이다〉는 주인공의식을 확고히 세워야 할 때입니다. 온갖 예속을 밀어내고 남한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로 부상되여야 합니다.》

다시 차는 달렸다. 차창으로 저만치 둥실 솟은 장고봉과 사초봉이 멀리 바라보였다. 녀인의 풍만한 젖통같은 산봉우리에 세워진 로씨야 군초소의 망원대가 마치도 젖꼭지처럼 안겨왔다. 그런데 방천촌에서 바라보면 5리밖의 장고봉이 장고처럼 보인다는것이다. 그래서 산 이름이 장고봉이다.

일찍 유명한《장고봉사건》이 거기에서 벌어졌다.

1931년《9. 18사건》으로 동북을 강점하고 다시 1936년《7. 7사변》을 조작하여 화북, 화중으로 진격하면서 기고만장해진 일제는 쏘련을 침략할 야심에 불이 당겼다. 1935년 한해에만도 국경선변경분쟁을 176차 감행하면서 쏘련을 집작거리기 시작한 일제는 1938년 전쟁의 도화선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그해 7월 15일, 조선족 농사군으로 가장한 마쯔시마오장과 이동군조 등 일행 셋은 김해남, 고운필을 안내자로 하고 쏘련군사시설을 정탐하다가 마쯔시마오장이 쏘련군에 격사되였다. 이것을 구실로 삼아 1938년 7월 31일 밤 12시 일군은 흥의리에서 장고봉 포격을 개시, 깜빠니야 적야습격으로 장고봉과 1키로메터 사이를 둔 서쪽 사초봉고지를 점령했다. 쏘련군은 십여대의 비행기로 장고봉, 사초봉, 경흥, 고음 등 일제의 고지를 포격, 쏘련원동군 사령 블류헤르는 8월 6일 반격을 명령했다. 대패한 일제는 10일 모스크바에서 정전협정에 조인했고 이튿날엔 장고봉에서 현지교섭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금은 장고봉의 산정을 기준으로 동서로 국경선이 철조망으로 쳐져있었다. 주둔군이 없는 로씨야측 헐망한 망원초소는 벽에 페인트로 쓴 로어문자가 다른 나라임을 자극할뿐이였다. 중국측 분계선엔 순라병들의 발길에 다져진 오솔길이 방화선등성이를 타고 구불구불 뻗어갔을뿐이다. 철조망도 가축의 월경을 막고 산짐승들의 침습을 막기 위한것일뿐, 포화에 시달렸던 옛 싸움터엔 고즈넉한 평화가 짙게 깔려있었다.

당시 전쟁을 목격한 옥천동 김광익로인은 말씀한다.

《쏘련비행기가 경흥을 폭격하려고 지붕우를 날아서 두만강을 건너갈 때면 비탈밭에 무성한 콩이 바람에 누웠다구요. 그때 비행기에서 쏜 중기 탄알깍지가 산과 들에 누렇게 덮여있었다우. 일본군의 한개 사단이 전멸을 당했다고 그래요. 장고봉밑에 있는 늪이 피로 물들었답니다.》

피로 물들었다는 못을 이곳 사람들은《장고봉저수지》라고 하는데 인공이 아닌 자연늪이였다. 크고 작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련결짓는 산발이 병풍처럼 둘러싼 속에 생겨난 못은 샘물과 눈물과 비물로 이루어졌다는것이다. 못은 두개,《큰 장귀》라고 불리는 큰 못은 25만평방메터,《작은 장귀》라고 하는 작은 못은 8만평방메터이다. 수심은 16~17메터나 되지만 물이 어찌도 맑은지 물밑이 아른아른 들여다보이는데 잉어, 초어, 붕어, 쏘가리가 물속에서 뛰놀고 손가락마디씩한 새우들이 무리지어 오갔다. 호수옆에 있는 자그마한 움집에 살면서 호수를 관리하는 조씨는 호수밑에 일본군의 땅크가 있고 그때 죽은 일군의 시체가 고기밥이 돼서 못속의 고기들이 크고 살이 쪘다고 했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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