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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1부 두만강 천리 - 제16장 조선족 삶의 현장(2)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5-17 09:46:21 | 최종수정 2018-05-21 12:3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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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1부 두만강 천리 - 제16장 조선족 삶의 현장(2)

《제 이름만은 밝히지 말아주시오. 내래 3년을 사랑한 약혼녀가 있었습네다. 그런데 장인될 량반이 중풍에 걸려 누웠지 뭡니까. 돈은 자꾸만 들고… 생각다 못해 약혼녀가 돈을 벌러 연길로 나갔디요. 그래서 내래 가시집 논밭까지 다 부쳤수다. 나중에 알고보니 유흥가에 있었는데 파혼을 하자고 기래요. 종당에는 거기서 만난 한국사람 기업가의 현지처가 됐답데다. 그 한국사람이 아파트까지 사주었다니 어디 고향에 오갔시오. 총각귀신이 되는 수밖에 없디요.》

농촌의 피페에 따르는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이동, 관내와 연해주로의 재이주 시작, 결혼률의 저하 그리고 이미 결혼한 생육년령 부부들이 소수민족은 아이 둘을 낳을수 있다는 우대정책을 무시하고 하나만 낳는 등 각종 원인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민족비례는 뒤바뀌여지고있다. 1990년 인구보편조사 당시 연변의 조선족 수자는 85만 4천 4백 68명, 전체 인구 213만 8천 397명과 대비하면 고작 39. 5%에 지나지 않았다. 1907년 연변의 총인구는 100, 500명, 그중 조선족은 77, 000명으로서 76. 6%였고 조선족비률이 한껏 높았던 지난 1926년 80.5%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조선족의 비률은 광복과 더불어 급격히 떨어져 1949년 835, 278명의 인구중 조선족이 63. 3%, 1979년 1784, 468명의 인구에서 조선족이 40. 6%를 기록했다. 현재 생육능력을 가진 녀성들이 대부분 아이 하나에서 단산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부터 30~40년이 지나면 인구가 절반이 줄어들기가 마련인데 그때에 가면 조선족의 인구는 겨우 10만좌우에 머물것이라는 추산을 하게 된다. 워낙 두만강연안 농촌은 거의 모두가 조선족이였지만 오늘은 거의 절반 수자가 한족이 점하고있다. 지난 70년대까지 한족이 단 1가구도 살지 않았던 숭선진에 지금은 1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였다. 화룡시 덕화진 농촌인구는 3,712명인데 그중 한족이 1,700명이란다. 이는 한족의 번창을 단적으로 드러낸것이다.

조선족마을이 한족마을로 뒤바뀐 사례가 허다했다. 원래 화룡시 숭선진 하천과 원봉, 로과진 치마대, 덕화진 차창즈, 룡정시 백금향 평정 등은 조선족마을이였으나 지금은 한족들이 주인으로 들어앉았다. 그속에서 쌀의 뉘처럼 조선족들이 더러 끼여있지만 자식들을 한족학교에 보낼 정도로 동화되고있는것이다. 명색이 연변조선족자치주일뿐 주내에서도 조선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있다.

한족마을을 지나다 보면 한뼘은 내려온듯싶은 코를 훌쩍훌쩍 들이마시는 아이들이 버글대고있다. 그러나 조선족마을에서는 아이들 울음소리마저 거의 뚝 그쳐버린 정도였다. 조선족들은 아이 하나면 만족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밖에 낳지 못하도록 정책으로 묶여있는 한족들은 아이들을 무우 뽑듯 쑥쑥 낳아 슬하에 자녀들이 주렁주렁하다.

차창즈마을의 한 한족은 아이가 아홉이나 된다고 한다. 이름을 미처 기억하지 못해서 번호를 매겨서 1호부터 9호까지 달았는데 아침과 저녁이면 부대에서처럼 번호를 불러서 확인한다는것이다. 한번은 우심에 갔다 오는데 한놈이 마차에 앉지 않은것을 모르고 집까지 왔는데 저녁 취침점검에서 모자란것을 알게 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변에서 한족들이 늘어나는 또 다른 요인은 외래 인구의 류입이다. 지난 1960~1963년까지 산동성에서 지변청년(支边靑年) 변방에 나가기를 지원한 청년)들이 대거 연변에 들어왔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친척은 물론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들여 화룡시 장살령의 경우 한 마을에 1백가구나 되는 산동사람들이 살고있다. 또 문화대혁명 당시 장춘, 북경, 상해와 같은 대도시에서 하방(下放)한 지식청년들이 아예 연변땅에 자리를 잡고 눌러산다.

근년에 조선족들이 땅을 버리고 도시로 마른 돈 벌러 들어가고 그 빈자리를 관내로부터 밀려온 한족 망류들이《고맙게》메꾸어주고있다. 룡정시 백금향 평정촌은 산언덕 마을이라 교통이 아주 불편하지만 농사가 잘 되여 농사군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고장이였다. 광복전까지 780여호 조선족이 거주했는데 지금은 겨우 15호 조선족이 살뿐이란다.

농촌인구의 류실과 조선족 인구 마이나스증장은 직접적으로 조선족 교육위기를 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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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룡시 덕화진 남평소학교
우선 농촌인구의 도시집중은 농촌의 교육현장에 그대로 반영되여 학교가 점점 더 썰렁해지고있다. 한족과 비교해 조선족이 더욱 심하다. 화룡시 덕화진의 조선족이 다니는 남평중학교와 한족이 다니는 차창즈중학교가 그 표본이다. 두 학교는 원래 같은 정원을 가지고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차창즈학교 재학생이 120명인데 비해 남평중학교은 겨우 80명으로 줄었다는것이다. 지난해(1993년) 덕화진 길지촌과 남평촌에서 신생아가 4명이 태여났는데 그나마 두집에서 도시로 이사를 가다나니 두아이만 남았다. 두 마을에서 8년후에 입학할 학생은 겨우 둘이라는 계산이다. 몇해전 로과진 호곡촌 학교모식을 도입해야 할 정도였다. 호곡촌소학교에는 선생 하나에 학생 둘이 있었던것이다. 개혁개방전까지는 마을마다 학교가 있었다. 교육보급률이 높은 표현이기도 했다. 그래서 화룡시 문화관의 사진작가 최정록씨가 호곡촌소학교를 찍은 사진은 국제화보에 기문으로 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옛이야기를 뒤로 밀고 지금은 촌의 학교들은 페교가 되고 향, 진의 소재지에 학교를 집중시키고있다. 화룡시교육위원회에서는 60명이하의 학교는 무조건 합친다는 규정을 내렸다. 덕화진 룡연촌 소학교도 학생이 60명, 4년후(1998년)이면 40명으로 줄어들 전망이여서 페교위기가 닥쳐올판이였다. 1985년 연변의 조선족소학교가 무려 419개소였는데 1995년에는 177개로 감소, 중학교는 118개로부터 49개로 축소되였다. 참새가 아무리 작아도 오장륙부를 다 갖추어야 사는것처럼 들어갈 돈은 다 들어가야 하므로 작은 학교를 여러개 합쳐서 하나로 하는것은 국가나 학생한테나 다가 리로운것이였다.

다음 조선족교원의 자질이 한족보다 뒤떨어진다. 연변대학 졸업생이 교원으로 배치되는 수자가 적은데다 막상 배치되였다가도 곧바로 직업을 바꾸기가 일쑤이다. 그런데도 초중교원양성을 전담하는 사범단과대학이 없다. 교원의 학력도 한족은 70%가 기준에 도달하지만 조선족은 그보다 낮다. 고중교원의 학력은 한족에 비해 높은 편이나 연변1중과 같은 중점학교를 제외하고는 실제 그러한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농촌학교의 교원질은 대단히 낮은 편이다. 숭선진중학교의 경우 대학입시에 떨어진 고중졸업생이 초중수학을 가르치는 형편이니 교원의 질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학교가 많고 교직원 수가 많다보니 국가재정부담이 가중해서 교원의 인기가 떨어졌다. 숭선진과 로과진의 교원중에는 그 흔한 흑백텔레비도 없는 집은 대개 교원가정이였다. 250원 남짓한 봉급에 쪼들리고있는 실정이니 누가 교원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연변에서는 교원직업이 인기가 없는것으로 알려졌다. 연길시 4개 학교 315명의 교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보면 응답자 40%외 60%의 교원은 학생을 사랑하지 않으며 교수임무를 참답게 수행하지 않는것으로 알려졌다.

무책임한 사람한테서 가르침을 받는 그 학생들의 질도 저하될수밖에 없는것이다. 학생들의 지식수준도 한족학생들보다 뒤진다. 조선족학생은 조선어 외에 한어와 다른 외국어를 배워야 하므로 학습부담이 큰데다가 몇개 조선족출판사에서 찍어내는 책으로 과외독서를 하는 가련한 처지이다. 그러니 수백개 한족출판사에서 출판하는 많고 질 좋은 책을 탐독하는 한족학생에게 자연히 뒤지게 되여있다. 대학입시에서 합격하여 대학으로 가는 학생수가 조선족속에서 차지하는 비례가 높다고 해서 매스컴은 왕왕 고아들대지만 일단 대학교에서의 학술탐구에서는 한족학생의 뒤에 묻어가는 상황이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오히려 소수민족으로 떨어진 조선족들은 저도 모르게 언어, 풍속 등 면에서 한족화되여가고있는 실정이다. 일찍 치발역복 당시 화룡시 덕화진 룡연촌에서 허치영, 김영준, 허종권 등은 상투를 자르고 호복을 입은 덕분으로 대상 10여헥타르 밭을 소유하고 일약 부호가 되였으며 광복전 화룡의 리영춘은 한족의 양아들로 들어가 대부자가 되였다. 그래도 당시는 조선족이 절대 대부분이고 일제통치시기라 한족들이 동화되는 수가 더 많았다.

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의 허정윤옹은 말씀한다.

《광복전 상화촌의 땅은 거의 한족 왕수찬지주 차지였습네다. 조선말을 모르는 그는 소작료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작인들의 조롱을 받기까지 했거든요. 한번은 왕지주가 강 건너 봇데기마을에 사는 소작인과 돈이 많고 위풍을 갖춘 사람을 조선말로 뭐라고 하느냐고 물었답니다. 그 소작인은 두손을 맞잡고 공손한 태도로〈고토리(함경도 사투리로서 남자의 생식기)올시다. 〉라고 짐짓 가르쳐주었군요. 곧이들은 왕지주는 이제부터 자기를 왕고토리로 불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말뜻을 해석해주었군요. 진노한 왕지주는 봇데기사람의 소작권을 박탈했답니다. 그 다음부터 왕지주는 의식적으로 조선말을 배웠고 그 자식들은 조선족이나 마찬가지로 말을 하게 되였답니다.》

조선족만 사는 백금촌이나 삼합 등지에 거주하는 한족들은 이미 조선족을 닮아 조선말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조선식 집에서 조선음식을 먹고 산다. 하지만 이제는 두만강연안 시골에서 조선족이 한족에 동화될 차례이다. 한족의 문화권에서 사는만큼 그리고 자급자족의 농업사회가 시장경제로 전환된 실정에서 어차피 동화는 불가피하다. 그 동화의 속도가 상상외로 빠르고 심도 역시 놀라와서 지어 해괴망측한 일까지 있다.

평정촌의 곽해부(郭海富 51세 한족)의 형이 장춘지구에서 돈으로 녀자를 사다가 안해로 만들었다. 그후 형이 죽자 동생 해부가 형수를 안해로 삼았다. 한 녀자에 두 남자의 소생들이라 형이 낳은 자식들은 삼촌이라 부르고 자기가 낳은 아이들은 아버지라고 한다. 형수를 안해로 품고 사는것은 한족 재래의 혼인풍속이라 별로 웃음거리가 안된다. 아직까지 조선족들속에서는 그런 실례는 찾아볼수 없지만 사촌쯤 되는 실례는 있다. 몇해전에 백금촌 40대 리모는 친구하고 안해를 바꾸는 새로운 풍속을 창출, 두 가정은 현재 연길에 거주하는데 어른들은 물론 두집 아이들까지도 아주 친하게 보낸다고 한다.

한족과 조선족의 통혼은 조선족이 이 땅에 발을 붙이기전부터였다고 한다.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의 천중백옹은 말씀한다.

《무산은 개척되기전에 리조의 정배지였다고 합데다. 언젠가 한 벼슬아치가 무남독녀를 데리고 지금의 무산아래 칠석동으로 정배를 왔는데 무인지대라 딸을 시집줄수가 없었다는군요. 어느날 강 건너에서 연기가 나는것을 보았답니다. 오늘의 로과진 호곡촌쯤 됐을지도 모르지요. 찾아가보니 한족 홀애비가 살더라는군요. 그는 한족을 사위로 삼고 강을 건너와 살았다고 합네다.》

한족과 사는 로인들을 보면 대개가 과부들이다. 조선족은 홀애비가 아니면 과부를 맞아들이지 않았으므로 한 남자를 건넜든 열남자를 건넜든 개의치 않고 더구나 돈으로 녀자를 사야 했던 한족들은 달갑게 조선족과부를 모셔갔다. 60여호 사는 평정촌에 한족과 사는 조선족녀인들이 일곱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한족녀자와 백년가약을 맺은 실례는 거의 없었다. 요즘 조선족처녀들이 한족남자들 품에 안기는 경우는 푸술하나 한족 처녀와 결혼하는 조선족총각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두만강은 경신향 방천촌에서 15키로메터를 더 흘러서 동해로 흘러든다. 량안의 넓은 땅을 적시며 수백만 인간의 생명수로 흐르던 담수는 찝찔한 소금물에 절어버린다. 그것처럼 조선족의 운명도 바다물에 삼키우는 두만강이나 다를바 없을게 아닐가?!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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