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1부 두만강 천리 - 제16장 조선족 삶의 현장(1)

글: 류연산

기사입력 2018-05-15 09:45:28 | 최종수정 2018-05-21 12: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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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진은 원래 만족의 선인 우쿠룬부(乌库伦部)의 옛 땅이다.《훈춘향토지(珲春乡土志)》의 기재에 따르면 이곳은 금나라시기엔 식염산지(食监产地)였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康熙) 53년(1714년)에 훈춘 협령(协领)이 설립되면서 이곳에 마을이 서기 시작했고 청나라 광서(光緖) 7년(1881년) 4월 흑정자에 초간국(招垦局)이 서면서 강 건너 조선사람들이 분분히 이주해왔다. 1932년 만주국에서 향촌제(乡村制)를 실시하면서 경신향으로 되였고 1934년 보갑제(保甲制)가 실시되면서는 경신보(敬信保), 1936년에 다시 가촌제(街村制)로 되면서 경신촌으로 이름이 바뀌였다.

경신진 소재지 마을 이름은 이도포(二道泡), 1881년에 세워진 부락으로 봉무동(凤舞洞), 련화동(莲花洞), 남화동(南花洞) 등 세개의 자연부락이 합쳐져 이루어졌다고 한다. 1938년부터 향의 기관이 앉아서 지금은 진정부와 정부기관의 소재지인 이도포의 인구는 1,450명이다. 그중 한족이 142명이고 조선족이 1,304명, 만족 4명이다.

자그마한 벽촌을 련상시키는 작은 마을이면서도 큰길 량옆에는 상점이며 식당이며 려관이며 지어 가라OK 간판들이 촘촘했다. 경치가 좋고 진내에 있는 아홉개의 늪에서 맛있는 물고기가 나고 또 련합국개발지역으로 지정된 후로 중앙에서부터 지방, 세계 방방곡곡에서 손님들이 밀려와 흥성거리는 곳이라서 음식업과 봉사업체의 수입이 짭짤하단다. 더구나 한때 밀수풍이 불 때에는 벽촌답지 않게 고운 아가씨들이 바글대기도 했단다.

개혁개방이후 농촌의 소득은 높아졌다. 1994년 룡정시 백금향 인구당 년간소득은 1천 6백원, 화룡시 숭선진은 1천 3백원, 그리고 경신진은 1천 2백원이였다.

《문화혁명때 이도포에서는 한공에 10전이 간 때도 있었시오. 우표 한장이 8전이였으니 사시장철 뼈 빠지게 일하고도 굶기를 밥먹듯 했지라우. 쑥에 소나무껍질에 안먹어본 별식이 없드랬시오. 그런 주제에 밭고랑 타고 앉아서 세계혁명에 관심을 가지라고 족쳐댔지우. 미친 광대놀음을 한거디요.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하지 않았더라면 모두 굶어죽었을겁네다.》

경신진에서 개체려관업을 하는 김창하로인의 말씀이였다.

화룡시 덕화진 룡연촌 박서양(朴瑞阳 69세)로인은 일제 때 울릉도에서 속아서 이민을 온 사람이다. 일본인들이 만주로 가면 들판에서 해가 뜨고 지는데 감자가 하도 커서 둘이서 하나를 다 못먹는 복지라고 하는 말을 듣고 1938년 고향을 등졌다. 그런데 웬걸, 무산에서 두만강을 건넜더니 하늘만 보이는 산골이였다. 아름드리나무를 베여 부지런히 농토를 개간, 그런대로 배불리 먹었다. 그러다 해방에 이어 문화대혁명을 맞았다. 문화혁명시기에는 겨우 감자톨을 구워 먹으면서도 거지로 빌어먹고 산다는 고향(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에서 연변땅 밀림지대로 함께 이주했던 24가구가 해방이후 거의 귀국해버렸지만 혼자 남은 그는 내내 당의 은덕에 감사했을뿐이였다.

《지난 90년도에 고향 울릉도에 갔더니 없는게 없이 살데. 나도 밥술이나 먹어 잘 사는줄 알았더니 그게 아이데. 해방전 지주집이라 해도 호주만 이밥을 먹고 다른 식구들은 조밥에 된장국이 고작이였으니 때마다 이밥을 먹는 요즘 지주도 부럽지 않다고 만족을 했었는데 한국에 갔다오고는 주눅이 들었어. 그래도 어쩌겠수. 팔자소관이지비. 땅 파먹는 놈 땅 떠나면 못산다구…》

땅을 믿고 한생을 살아온 박서양로인은 내가 룡연에 들렸을 때 그 고지식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밥술이나 들게 된 농촌에서《농자천하지대본(农者天下之大本)》은 날로 색이 바래지고있었다. 두만강류역 숭선에서부터 경신에 이르기까지 마을마다 주인 잃은 집 이영엔 로신이《고향》에서 묘사한 고향집마냥 풀이 무성했고 묵어난 밭들에도 범이 새끼를 칠만치 풀이 숲을 이루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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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촌의 폐가
화룡시 로과진 호곡촌은 무산과 마주한 오붓한 17호 인가를 가진 마을이였는데 처음 내가 갔을 때인 1994년 10월에는 그나마 3개의 굴뚝에서 연기가 났었는데 이듬해 봄에는 아예 사람 그림자마저도 없었다. 그리고 화룡시 덕화진 부동촌은 독립군 안무일가가 자리잡고 항일을 해온 유서깊은 마을로서 광복후 7백여호 인가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황페해져 농사군은 한집도 없다. 두만강 언덕에 자리잡은 초가들은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대머리모양으로 이영이 훌렁 벗어져 귀신이 살기에 알맞는 마을이 되였다. 그같이 을씨년스러운 마을에 유독 한집만이 앞마당에 닭 몇마리가 구구구~ 모이를 쫓고 개가 행인을 보고 콩콩 짖는다.

나는 지나가던 걸음에 그집에 들렸었다. 늙은 량주가 따뜻한 온돌에 앉아서 이불을 꿰매고있다가 내가 들어서니 대단히 반가와했다. 아이들 소꿉장난 모양으로 개와 닭하고 동무하며 적적하게 살아가던 량주는 낯도 성도 모르는 길손이지만 찾아온것이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였다. 인간무리에서 살면 인간이 혐오스럽다가도 인간이 없는 곳에 살면 오히려 그리워 한시도 인간을 떠나 살수 없는것이 사람인가 보다.

주인의 이름은 리성국(李成国 60세), 화룡시에 거주하는 퇴직로동자였다. 지난해(1993년) 8월, 4백원에 버린 집을 사서 들었다고 한다. 오랜 간염환자라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휴양삼아 와있다는것이였다. 화룡시에 있는 자식들이 쌀이며 채소며를 날라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령감이 운동삼아 자전거를 타고 십리밖 남평에 가서 사오기도 한다는것이다. 농사군들이 삶을 찾아 버리고 간 산수 좋은 이 땅은 서서히 주인이 바뀌여 터밭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휴양지로 변해가고있는것이다. 숭선진의 경우 1990년에 1,025가구가 살았는데 1994년말까지 990호로 줄었는데 그것은 호적을 떼여간 사람들이고 호적은 두고 몸만 간 사람들은 무려 620여명이라고 했다.

쉽사리 농촌을 떠나 도시에 적응할수 있는 사람은 처녀들이였다. 그래서 농촌에서는 갑자기 처녀가물이 들었다. 향진의 총각 처녀가 배필을 무을수 있는 적정비례가 깨여져 25대 1이라는 수치가 나와있다. 그래서 처녀가 아무리 박색일지라도 총각들을 줄 세워놓고 이마를 튕길수 있게 되였다는 이야기도 거짓말이 아니다. 시골치고 생활이 윤택하다는 룡정시 대소과수농장 총각들은 장가 못가는 근심이 없이 살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처녀들이 제 마을 총각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수를 높여 도시만 바라보고있다는것이다.

옛날에는 딸 가진 부모는 두번 섧다고 했다. 낳아서 섧고 시집 보낼 때 섧고. 지금은 세월이 바뀌여서 아들을 둔 부모들이 한숨을 쉬게 되였다.

1994년 10월 룡정시 개산툰진 모 촌에 이른 날 마침 마을에 잔치가 있었다. 34살 로총각이 룡정시 모 진에 사는 녀인을 안해로 맞는 날이라고 온 마을이 경사가 난듯 떠들썩했다. 몇해사이에 딸들을 외지로만 내놓다 모처럼 녀인 한사람이 마을로 들어오게 되였으니 법석을 떨만한 일이기도 했다. 선구촌에 남아있는 혼기가 찬 처녀가 단 하나뿐이여서 우글거리던 로총각들도 경쟁자가 하나 줄어든터라 이날 혼사가 사실상 기쁘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떡줄 사람은 궁리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라 하겠다. 요즘 세월에 귀한 딸을 농촌에 주려고 하는 부모도 흔치 않거니와 농촌총각을 배필로 삼겠다는 처녀도 없기때문이다. 이날 맞는 신부도 남편 하나를 이미 거친 리혼녀인데다 그나마 다리를 저는 불구자이고보면 알만한 일이다.

시골은 처녀가 바닥이 나고 도시는 처녀 사태가 터졌다. 공장과 상점 등에 취직하기도 하지만 아무런 연줄도 없고 가진 재간도 없는 녀성들이 쉽게 찾을수 있는 직업은 음식점과 유흥업소이다. 그녀들은 적지 않게 자의든 타의든 부모가 물려준 몸을 밑천으로 돈주머니를 챙긴다. 잠간 사랑이 50원, 긴 밤 봉사는 1백원이 표준이란다. 한달수입이 보통 4~5천원, 대개 젖가슴을 타고 넘는 사내의 수가 많을수록 수입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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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골마을에서의 결혼식
바로 그런 녀인들을 고용하여 밀수군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서 숭선진, 삼합진, 개산툰진 등 통상구를 가진 두만강역의 마을들이 경신진처럼 거리에 음식점과 가라OK가 촘촘히 생겨나게 했던것이다. 그래서 한때 도시에서만 성행하던 성병이 시골에까지 묻어왔었다. 시골마을의 변소나 마을 길옆에 세워진 전선대에《일차성제근(一次性除根)》이라는 성병치료 광고판이 나붙어있는것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매음은 불법으로서 지하영업으로 되여 있다. 일단 경찰에 잡히면 남자는 5천원 벌금에 행정처벌을 받고 당원은 당적제명을 당한다. 매음녀도 벌금형에다가 15일 구류를 살아야 한다. 암암리에 진행되는 업이다 보니 위생조치가 따라가지 못해 성병은 더욱 급속도로 파급되는것이다.

유흥가에 발을 들여놓은 녀성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남성들이 징그럽다는것과 돈을 벌면 혼자서 살지언정 시집은 가지 않겠다는것이다. 그런데도 징그러운 남성들을 상대로 쉽게 돈을 벌면서 매춘을 후생수단으로 삼은 이들 녀성은 귀향의 꿈은 아예 꾸지도 않는다. 매춘을 일삼는 녀성들사이에는 착한 농촌 총각 약혼자를 헌신짝 버리듯 팽개친 경우가 흔히 있다. 유행가 가사같은 한 농촌 총각의 하소연을 들었을 때 참으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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