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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1부 두만강 천리 - 제15장 판도라의 호리병 - 회룡봉(7)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5-10 09:44:18 | 최종수정 2018-05-10 10: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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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백년 한옥

회룡봉도 연변의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황페된 모습이였다. 여기저기에 빈 집들이 있었다. 풀이 무성한 길가 초가집 마당에 버려진 연자방아가 한때 사람들의 체취를 전해주고있었다.

마을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것은 경신변방파출소 회룡봉경무실(敬信边防派出所回龙峰警务室) 건물이였다. 그제나 지금이나 회룡봉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경고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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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 ⓒ 봉황망(凤凰网)
우리는 회룡봉에서 제일 오랜 한옥을 찾아갔다. 연변주정부에서 민속건축문물로 등록하였다고 한다.

전통한옥이였다. 뜨락을 알뜰하게 가꾸었었다. 삽작문 대신 이깔나무를 가로 걸쳐놓았다. 넉넉한 살림에 풋풋한 인정에 젖어 살았을 옛사람들의 정취가 느껴졌다. 옛집의 옛 모습이 그대로 살아서 그 옛날의 시공간으로 들어가는것 같은 감이 들었다.

집에는 박영규(朴永奎 1926년 생)옹이 거주하고있었다. 집 원 임자는 유인칠(俞仁七)이였고 박씨네가 1955년에 샀다고 한다. 팔간집 널마루에 앉아 널찍한 마당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국경의 벽 넘고 넘어》의 한 대목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 우리 집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였고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거의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였다.

할머니는 이런 손님들이 오면 밥을 짓거나 씨암탉이라도 잡아서 대접하는것이 보통이였다. 이런 할머니를 온 동네가 받들어 섬겨마지 않았다.

… (아버지가) 훈춘현립제1소학교 교장 재임 때의 일이다. 재학생이 250명쯤 되는데 1년에 한번씩은 제자들 전원을 집으로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집 마당에 멍석을 펴고 송판을 깔기도 하여 편히 앉도록 하고는 돼지부터 잡도록 했다. 그 당시만 하여도 만주에서는 백미를 구하기 힘드니까 좁쌀이나 피쌀로 음식을 정성껏 차려 융숭한 대접을 하였다.

… 돼지 한마리를 기르는데의 정성은 말할것도 없고 재산목록에서도 빼어놓을수 없는것이였다. … 아버지는 학생들에게 독립항쟁의 필요성을 고취하고 정신무장을 시키려는 의도가 뚜렷했다. 바로 우리 집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교육도량(敎育道场)인 셈이였다. (제23~30페지)

박영규옹을 모시고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들을 하는중에 김재홍선생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남표장군이 미국에서 걸어온 전화였다. 6촌동생 박남권의 안내를 받아 자기의 고향 회룡봉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좀해서 궁금증을 눅잦힐수 없다는것이였다.

장군의 목소리가 좁은 집안을 채웠다.

《1933년 겨울이였습니다. 어머니가 쏘련으로 떠나면서 따뜻한 봄이 오면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기다렸어요. 그런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시지 못했습니다. 스탈린이 우즈베크스탄으로 강제이주 시켜 끌려간거지요. 1939년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류학을 가서부터 나는 전혀 혈육들의 소식을 몰랐습니다. 1973년에 예편하고 미국에 가서 정착해서 3년이 지나서부터 중국과 쏘련에 수소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편지는 몇번 오갔지만 만나 뵈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사망하시고 8년이 지난 1989년에 따슈겐트 교외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가서 발을 구르며 통곡했습니다. 1991년 6월에 평양에 계신 고모님을 만나서야 아버지께서 만주로 정찰임무를 맡고 오셨다가 1945년 8월에 일본군에 잡혀 사망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시신도 찾지 못해 지금은 어디에 묻혀있는지도 모릅니다. 회룡봉에서 나서 자란 할아버지 자손들은 이제는 6개 나라에 널려 살고있답니다. 남북한과 러시아, 카자흐스탄, 미국, 중국에서 산답니다. 이제 나이 80이 넘고보니 자꾸만 고향생각이 나요. 우리 집은 한옥이였거든요. 할아버지 형제분들하고 식구들이 모여서 담소하면서 식사를 하는 그때가 자꾸 꿈에 나타난답니다. 언제 한번 또 가고싶네요.》

김재홍선생은 대답했다.

《장군님, 시대가 예전 같지 않아요. 비행기 타면 미국에서 회룡봉으로 하루면 와 닿을수 있습니다. 서울까지 오시면 제가 모시고 올게요.》

휴대폰에서는 박남표장군의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맙습니다. 제 몫까지 실컷 구경하고 오세요.》

박장군은 6촌동생 박남권하고도 통화를 하고나서 좌중에 계신 사람들에게 일일이 문안을 했다.
오후 1시였다.

미국 시간으로는 새벽이였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박장군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였다.

두만강을 바다라고 가정하면 회룡봉은 삼면이 바다에 둘린 한반도와 같은 형국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으로부터 항일투쟁, 그 이후의 회룡봉사람들간에 치루어야 했던 조선전쟁과 지금도 겪고있는 리념갈등 등등을 미루어서 회룡봉은 한반도의 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회룡봉 옛집에 모여앉아 오순도순 지나온 옛이야기를 나누지 못해하는 박남표장군과 같은 회룡봉 사람들의 마음은 오늘 분단된 현실을 살아가는 한민족의 공동한 념원이였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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