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문] 혈연의 강들上 제1부 두만강 천리 - 제15장 판도라의 호리병 - 회룡봉(6)

글 : 류연산

기사입력 2018-05-08 10:07:32 | 최종수정 2018-05-08 1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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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권은 그들 부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썼다.
그것을 간추려 적는다.

- 어느 하루 왕버스산골에 내려가 선전활동을 하고 돌아온 고기준은 남편이 상한병(한국에서는 머저리병이라고 했음)에 걸려 상난거우초막에 누워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밤길을 타고 찾아갔다. 남편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담요에 남편을 눕혀서 설한풍을 맞받아 눈판을 끌고갔다. 간신히 쏘련땅에 들어섰다. 쏘련에서는 환자만 남겨두고 성한 사람은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였다. 그때로부터 남편의 생사를 모르고 살아오다가 고기준은 훈춘에서 리발사 령감을 만나 재혼을 하였다. 김한응은 우즈베크로 갔고 거기에서 쏘련녀인과 결혼하였다. 1955년 김한응은 중국 사회주의농촌건설을 지원하는 기술자로서 쏘련의 파견을 받고 가족을 데리고 연변 연길현 김시룡농장에 와서 3년을 있었다. 그때 수소문하여 고기준을 찾았지만 이미 그녀도 아들딸을 둔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된지라 만남이 어색하기만 했다. 1980년 홀로 난 김한응은 고기준을 잊을수 없어 인편으로 탐문했다. 고기준 역시 그맘때 남편을 잃고 홀로 계신다는 말을 듣고 김한응은 쏘련에서 특별방문을 왔고 돌아갈 때 고기준과 동행을 했다. 남남으로 반세기 남짓 살아온 부부는 저승을 눈앞에 두고 재결합하였다. (《할아버지 박창일》제70~80페지)

《회룡봉촌사》에서 나는 놀라운 수자를 발견했다. 해방전쟁과 조선전쟁, 항미원조에 참가한 사람은 무려 87명. 그중에서 렬사가 26명이라고 하면 3분의 1의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 모두 1920년대와 1930년대 태생으로서 20~30대의 생기 왕성했던 젊은이들이였다. 그리고 렬사와 투사들의 략력을 살펴보면 그들 신분의 변화를 엿볼수 있었다. 항일렬사들과 투사들은 모두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련군소속이지만 광복후 중국인민해방군과 조선인민군으로 소속이 바뀐다. 그리고 항일투사중 안길, 리봉수 외에도 박장춘(朴长春 조선인민군 중장) 장군이 있다.

《회룡봉촌사》가 기재한 회룡봉출신 10명 조선인민군 장군들을 보면 안길대장의 장남 영호(永浩) 상장, 차남 영환(永煥) 중장이 있고 박장춘의 장남 상규(相奎) 소장이 있다. 그 외 박남룡(朴楠龙 박춘영의 아들)소장, 김원삼(金元叁 김권영의 아들) 중장, 최영호(崔永浩 최영삼의 사촌) 중장, 박명규(朴明奎 박영규 동생) 소장 등 모두 항일렬사와 투사들과 혈연관계를 가진 분들이다. 회룡봉출신들이 조선인민군에서 유난히 장군이 많은것은 항일렬사유가족에 대한 특별대우와 직접 관련되여 있다. 특히 김일성주석과 함께 항일을 해온 안길이나 리봉수나 박장춘과 같은 분들과의 인맥이 뒤받침이 된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항일투사의 후손이라는 점이 오히려 흠이 될수도 있는 한국에서 인맥 하나 없이 장군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있다. 박남표장군이다. 그의 장군별에는 6.25전쟁에서의 공로가 분명히 기입되여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번 전쟁은 그한테는 회룡봉 고향사람들과의 죽고 죽이는 싸움이였다.

- 나는 신상철(申尚澈) 사단장이 지휘하는 7사단 참모로서 포항전투에 참전하였는데 그때의 격전은 이루 말할수 없다. 1950년 8월 포항, 안강, 영천 전투에 투입된 인민군 4군단 정치수석참모 박남선대좌는 나의 6촌동생이였고, 그 휘하 인민군 5사단 보병대대장 한강열소좌는 나의 둘째 고모부였다는 사실, 그밖에도 6촌동생 6명이나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것을 1988년 중국에 갔을 때 확인하였다. (《국경의 벽을 넘고 넘어》제94페지)

박남표는 평생에 아홉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중에 세번은 조선전쟁에서였다.
그는 썼다.

- 여섯번째 위기는 6.25 공산군 남침으로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떨어져 철수작전을 할 즈음이였다. 6월 28일, 한밤중 한강대교를 건너고나자 곧 다리가 끊어졌다. 불과 분초사이에 생사가 엇갈렸다. 생과 사가 종이 한장 사이라는것을 느낀 아슬아슬한 순간이였다.

일곱번째 위기는 1950년 11월,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한국전에 개입하기 직전 국군은 평양을 거쳐 덕천-양덕지구로 한창 진격하다가 평북 덕천지구에서 포위되고말았다.

당시 중공군의 포로가 되거나 전사한 장병들이 대다수였는데 나는 포위망을 뚫고서 평양을 철수하여 생명을 건질수 있었다.

여덟번째 위기 또한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사선을 넘어섰던 현리작전 때였다. 1951년 3월, 3군단이 포위당하여 엄동설한속 1천 5백 고지인 방대산과 구룡, 덕봉, 오대산을 거쳐 탈주해 나오는데 2박 3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진부령에 왔을 때에는 발톱 열개가 다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그때 헤아릴수 없이 많은 장병들이 전사하였는데 나는 요행히 병원에 후송되여 생명을 건질수 있었던것이다. (《국경의 벽을 넘고 넘어》제77~78페지)

그처럼 사선을 넘나들면서 싸운 용사로 장군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그는 친일이 아닌 항일가문 태생이라는것이 오히려 흠이 되여 사회적으로 이단시 당했다.

- 친일 아닌 항일투쟁으로 빛나는 집안 출신인 나를 이단시하는 풍토에 당황하였고 역겹기만 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나서 반민특위가 구성되였다. 그 해 10월《동아일보》사설에서까지도 내 문제가 언급되였다.

《친일파의 득세로 말미암아 청년 장교가 된 지난날 독립투사의 후손들이 현재 사기가 대단히 위축되여 울부짖으며 한탄하고있다.》

이 기사만으로도 나의 억울한 사정을 어느 정도 대변해주었고 위로가 되였다.
나는 반민특위로 김상덕위원장과 김상돈부위원장도 찾아가 내 사정을 호소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친일파검속을 제대로 못하고 얼마 뒤 친일경찰과 갈등을 빚으면서 해산되는바람에 친일파소탕은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제85페지)

박남표의 부친 박지영이 옥천동에서 탈옥하던 그날 당번중에 허길룡(许吉龙)이라는 순사가 있었다. 그의 권총사격에 맞아 항일혁명가 한명이 희생되였다. 허순사도 중상을 당했다. 그의 공로를 기리어 일본헌병대에서는 동생 허정일(许正一)을 특별 배양하였고 그는 일본관동군헌병보좌관이 되였다. 1944년에 허정일은 자기의 형에 대한 보복으로 박지영의 부친 박창일을 붙잡아서 고문, 치사시켰다.

광복이 나고 월남한 허정일은 한국군특무대에 들어가 반공투사로 맹활약하였다. 그는 갖은 모략으로 박남표를 제거하려고 했다. 만약 허씨가 차사고로 일찍 죽지 않았다고 하면 박남표는 어떤 시련을 겪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였다. 5.16 이후 다행이 김재춘(金在春) 정보부장의 선처로 간신히 혐의에서 풀려났다고 한다.

혁명렬사기념비에는 렬사들의 이름만 새겨져있다. 그들의 신상에 대해《회룡봉촌사》가 생졸(生卒)년대와 생전 소속을 간단히 밝혀두고있다. 하나같이 공산당의 혁명활동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민족계렬 독립운동은 중국공산당항일투쟁사에서 배제되여 있기때문이다.

공산당의 항일투쟁은 하늘에서 문득 떨어진것도 아니고 땅에서 불쑥 솟아오른것도 아니다. 공산당의 항일투쟁은 민족독립운동의 토양속에서 성장했고 독립운동의 계속이고 발전이였다.

1919년《금당 7인 참안》을 회룡봉 민족독립운동의 주요한 사건이라고 하면 1933년《벌등 6인 참안》은 회룡봉 공산당항일투쟁의 주요한 사례이다.《7인 참안》은《6인 참안》의 전주곡이고《6인 참안》은《7인 참안》의 필연적인 발전추세이다.

《세기와 더불어》(3)에 이러한 대목이 있다.

- 마을에 의병이나 독립군출신이 한두명만 있으면 그런 마을은 혁명화도 더 쉽게 할수 있었다. 리태경처럼 무기를 파묻고 투쟁을 중도 반란한 독립군들도 거의나 애국심 하나만은 버리지 않고있었다. 그들이 핵심이 되여 이집저집 돌아다니며 산에서 고생하는 혁명군을 잘 돕자고 호소하면 누구나 다《그래얍지요.》하였다. 그들이 나서서 마을에 혁명군이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고 물으면《떡을 쳐얍지요.》하든가《소를 잡아얍지요.》하였다. … 그래서 나는 어떤 마을에 가나 독립군출신 유지들과의 사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제341페지)

회룡봉출신 독립운동가를 꼽으라면 한형권(韩馨权)이 있다. 그는 1921년 림시정부 리동휘의 지시에 의해 김립과 더불어 쏘련에 가서 레닌으로부터 60만루불의 독립자금을 수령해오기도 했다. 그의 부친 한규량은 박창일과 결의형제였고《금당 7인 참안》에서 희생되였다. 그 날 회룡봉《혁명렬사기념비》를 마주하고 김재홍선생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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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전쟁 ⓒ 봉황망(凤凰网)
《장재촌(룡정시 지신진 장재촌) 김약연할아버지가 사셨던 옛집의 막새기와에는 무궁화와 태극기와 십자가가 하나로 어울려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민족과 나라와 하나님은 하나라는 의미지요. 그리고 왕청현 라자구 태평촌 동굴에 일찍 김일성주석이 항일을 할 때 있었다고 합니다. 그 동굴 벽에는 태극암각화가 있습니다. 그림 옆에는 네분의 이름자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선명한것은 리준(李俊)입니다. 리준렬사가 이곳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지요. 항일운동은 결코 독립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근거가 아닐가 싶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공산당의 항일투쟁은 민족독립운동의 연장이였음을 새삼 느꼈다. <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rz@ifeng.co.kr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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